자극적인 기사와 섣부른 댓글 보고 한숨짓는 건 감독과 배우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은교〉를 보는 2시간이 무척 흡족했던 사람은, 여고생 은교의 전라 노출에 달뜨기보다 노교수 이적요의 주름진 전라 노출에 괜스레 마음이 짠해졌던 사람은, ‘파격’만 앞세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제법 ‘품격’을 갖춘 인생 이야기라는 걸 직접 확인하고 안도했던 사람은, 특히 “잘 가라, 은교야” 늙은 시인의 마지막 대사가 마음을 짓눌러 얼른 자리를 뜰 수 없던 사람은, 그래서 오늘만은 극장의 불을 조금 천천히 켜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사람은, 한마디로 나 같은 사람은! 내가 찍은 것도 아닌데 감독처럼 크게 한숨짓고 내가 벗은 것도 아닌데 배우처럼 깊게 상처받는다.
〈은교〉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어차피 이 영화를 볼 생각도 없으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분들은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나 몰두하실 일이다. 미안하지만 내가 본 〈은교〉는 당신들이 오해하고 단정 짓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런 영화다.
여기, 시인 이적요(박해일)가 있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국민 시인이며, 이제는 세속과 연을 끊고 두문불출하는 한국 문단의 거목. 하지만 이적요 본인이 자신의 현재를 설명할 때는 훨씬 단출한 어휘가 사용된다. 늙.은.이. 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함께 늙어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늙은이 이적요. 그에겐 젊은 제자 서지우(김무열)가 있다. 존경하는 스승님 밥상에 정성스레 미역국을 끓여내고 방을 청소하는 한편, 틈틈이 책도 한 권 써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상은 다 그를 보고 천재라 하는데, 이적요만 아직 아니라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온 어느 날. 한 소녀가 현관 앞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신발은 신지 않았고 발뒤꿈치엔 흙이 묻어 있다. 은교(김고은). 호기심은 많은데 친구가 별로 없는 열일곱 살 여고생.
〈은교〉는 예상대로 삼각관계다. 그런데 삼각형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 ‘은교를 욕망하는 두 남자’가 아니라 ‘이적요를 동경하는 은교와 서지우’의 삼각관계. 이게 〈은교〉를 ‘그렇고 그런 영화’로 만들지 않는 힘이다. 충분히 젊지 않은 남자가 젊은 남자에게 느끼는 열등감, 충분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대단한 타인을 보며 갖는 시샘, 아직 충분히 나이 먹지 못한 소녀가 근사하게 나이 든 예술가의 평생을 보며 품는 동경,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젊음과 사랑을 열심히 ‘상상’하는 것만으로(그래서 이 영화에는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 70대 노인의 육신과 10대 소녀의 육체가 뒤섞이는 정사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노년의 희열까지.
자신이 만드는 영화 속 인물과 그 인물의 삶을 참 소중히 여긴다고 느끼게 하는 감독이 있다. 〈사랑니〉를 만든 정지우 감독이 그랬다. 그가 〈사랑니〉에 이어 또 한 번, 한 사람의 사랑영화이면서 다른 한 사람의 성장영화를 만들어냈다. 적요의 사랑과 은교의 성장. 모두 아프고 또 모두 아름답다.
끝으로 ‘올해의 명대사’로 기억될 이적요의 한마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내가 받은 상은 이미 다 써버렸다. 이젠… 벌 받은 일만 남은 건가?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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