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년 만이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 재학 중인 학생이 또 숨졌다. 4월17일 오전 5시40분, 전산학과 소속 김 아무개씨(23)가 기숙사 건물 4층에서 14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그리고 그는 15층으로 걸어 올라가 창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는데… 요즘에는 열정을 내보려고 해도 순수성이 사라져서 힘이 나지 않네요. 그저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엄마, 아빠, 동생… 사랑합니다.”

2007년 김씨는 카이스트 수학과에 입학한 뒤, 전산학과로 전과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같은 과 동기는 “(김씨가) 전공을 바꾸고 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직전 학기 성적은 3.3이었다.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학내 밴드를 하며 축제 때마다 무대에 올랐다. 

김씨는 3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해 지난 2월 복학했다. 카이스트를 졸업하는 학부생은 한 해 980여 명. 그중 대학원 진학 80%, 해외 유학 10%, 기업체 취업 10% 정도로 진로를 정한다. 연구 쪽으로 진로를 택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은 대개 군 복무보다는 ‘병역 특례’를 택한다. 친구들에 따르면, 김씨는 입대 전부터 ‘공부를 계속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진로 고민을 하곤 했다. 복학 후에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김흥구

1년 전. 벚꽃이 흩날리던 지난해 봄에도 카이스트 학생 네 명과 교수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뒤 학교 측은 새 교과목 ‘즐거운 대학생활’을 신설하고, 상담 시스템을 24시간 가동하는 등 자살 예방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그러나 이번에 숨을 거둔 김씨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난 2월 복학한 김씨는 학교에서 실시하는 심리 테스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카이스트는 4월 초 희망자에 한해서만 정기검진을 실시한 바 있다.

지난해 연이은 자살 사건 이후 카이스트는 1년 넘게 내부 갈등을 겪어왔다. 서남표 총장의 대학개혁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결국 “자살 원인은 복잡하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던 학교 측은, 교수협의회(교협)가 제안한 혁신비상위원회(혁신위)를 꾸려 교수·학생의 의견을 듣겠다는 뜻을 밝혔다. 개교 이래 최초로 비상 학생총회가 열리는가 하면, 총장과의 대화, 긴급 이사회, 대학원 간담회 따위도 잇달아 소집됐다.

학교의 운영 전반을 검토하는 혁신위가 생기기도 했다. 교협·보직자·학생 대표 13인이 구성되면서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기대를 모았다. 서남표 총장은 ‘혁신위 결정을 반드시 수용하고, 즉시 실행한다’는 데 합의했다. 지난해 5월, 혁신위는 △등록금 심의위원회 구성 △학기제 변경 △신입생 디자인 과목 기초선택 과목으로 변경 △학사과정 등록금 제도 개선 △영어강의 제도 개선 등 논란이 된 학사 정책을 변경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남표 총장은 “혁신위 활동이 종료되는 7월 이후 이를 이사회에 보고하고 실행할 것이다”라고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8월25일에 열린 이사회에서는 혁신위 안건 26개가 보고되었다. 이 가운데 △대학평의회 발족 △카이스트 이사 선임 절차 개선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준 제정에 대한 의견은 의결이 보류됐다. 홍보실 관계자는 “(교협이) 학교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라고 말했다. 

ⓒ김흥구자살한 카이스트 재학생을 위한 추모 공간. 카이스트는 총장과 교수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는다.

개별 교수들까지 실명으로 총장 사퇴 촉구

논란이 되었던 ‘학부생 등록금 성적차등 징수’는 시행 5년 만에 폐지되었다. 학점이 2.0 이상인 학생들에게는 수업료 전면 면제, 3.0 이상인 학생들에게는 기성회비까지 면제하는 방안으로 대체했다. 또 8학기를 초과하면 수업료 전액을 내고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규정도 완화되어 국공립대 수준 등록금(약 320만원)만 내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의 반발을 샀던 ‘전면적 영어 강의’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로써 교양과목 최소 이수 요건 21학점 중 18학점 이상을 영어 강의로 수강해야 했던 부담은 줄었다. 하지만 전공과목의 영어 강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몇 가지 합의가 도출되었음에도 교협과 총장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지난해 9월 말, 교협은 총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혁신위 의결 사항을 시행하지 않는 점, 독단적인 리더십, 학내 구성원과의 소통 부재 등이 이유였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소통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라며 사태를 봉합하려 들었다. 그러나 서 총장이 “혁신위 합의서를 잘 모르고 사인했다”라고 말하면서 논란은 다시 증폭됐다.

지난 1월, 교협은 서 총장의 해임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해 이사회에 요청했다. 당시 실시한 교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383명 중 289명(75.5%)이 ‘총장 해임촉구 결의안 채택’에 찬성했다. 교협에는 전체 교수 591명 중 536명이 가입돼 있다. 하지만 서 총장은 1월11일 열린 부총장단 회의에서 “내가 나가면 교협은 무엇을 할 것인가. 대안을 언급한 적이라도 있었나. 교협이 내놓은 유일한 대안은 내 사퇴다”라며 퇴진을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2월7일 열린 이사회는 서 총장 해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서 총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 3월7일에는 서남표 총장이 교협 관계자를 고소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서 총장 자신의 특허를 둘러싸고 ‘가로채기 의혹’을 제기한 교협 소속 교수 4명에 대해서였다. 최근에는 카이스트 16개 학과와 1개 단과대학 교수 262명(4월19일 현재)이 서 총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기명 성명을 발표했다. 그동안 교협과 교수평의회의 용퇴 요구는 있어왔지만, 개별 교수들이 학과 및 단과대학별로 실명을 밝히며 총장의 용퇴를 촉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국, 총장과 교수들의 싸움이 지지부진하게 지속되는 가운데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학생회관에서 만난 전산학과 3학년 학생은 “총장과 교협이 학교 운영 주도권을 놓고 대립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심각성을 모른다”라고 말했다. 경종민 교수협의회장(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은 “학교와의 싸움이 지속되면서 학생들을 보듬고 지도하기 어려웠다. (학생들이) 취업과 진로 문제 등을 둘러싼 불안함과 학교에 대해 느끼는 답답함을 해소할 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이번 사건으로 지난해 연쇄 자살 사건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라며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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