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에서 아버지는 빚만 남기고 실종된다. 실종된 아버지의 빚을 딸이 갚아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사채업자들은 딸(김민희 분)에게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결국 시달리다 못한 딸이 또래를 죽이고 신분을 위장한다는 게 영화의 모티브다. 영화는 허구를 보여주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김민수씨(가명·27)가 떠안고 있는 빚은 1억7400여 만원. 민수씨는 이 돈을 한 푼도 만져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시작한 사업 때문에 생긴 빚이다. 건설업체에 근무하던 아버지 김씨(57)는 IMF 외환위기때 희망퇴직한 후 건설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사업은 여의치 않았다. 지난 2010년 경북 울진에서 개발사업을 벌이며 7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공사가 완료될 즈음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공사대금도 받지 못했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투자금은 고스란히 빚이 됐다. 이자는 점점 연체됐다. 이때 ㄱ은행에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자녀나 주변 사람 이름으로 회사를 차려 연대보증을 통해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김씨는 민수씨 명의로 유령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 부채를 비롯한 자산을 민수씨 회사로 넘겼다. 민수씨 회사에 대한 보증은 김씨 본인이 섰다. 일종의 ‘돌려막기’였다. 이때 민수씨에게 넘어온 부채가 1억7400여 만원. 다달이 이자만 93만원이었다.


ⓒ시사IN 윤무영개인회생 절차를 상담하는 법무사 사무실 앞을 한 대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회사 상황은 계속 나빠졌다. 지난해 7월부터는 은행 이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민수씨가 대표이사로 등록된 유령 회사는 3개월 이상 이자를 밀렸고, 민수씨는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가 됐다. 통장정리를 하기 위해 은행에 방문했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민수씨는 서울의 한 마트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취업 시 제출해야 할 서류는 친구의 것으로 대신했다. 학생인 친구가 양해해준 덕분이다. 민수씨도 떳떳하게 자기 이름으로 일하고 싶다. 하지만 재산이 생기면 은행에서 차압할지도 모른다. 신용카드는 애초에 쓰지 않았다. 통장도 없앴다. 민수씨 시급은 4600원, 한 달 수입이 100여 만원쯤 된다. 이렇게 번 돈으로 차비와 식비 등 생활비를 해결하고 부모님에게 30만원씩 부친다. 지금 수입으로는 원금은커녕 밀린 이자도 갚을 수 없다.

지난해 말, 아버지 김씨는 빚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역시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다. 집을 판 1억5000만원으로 주택담보대출금과 그동안 미룬 이자를 갚았다. 그리고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로 집을 옮겼다. 그러나 여기저기 흩어진 대출금 수억원은 손도 못 댔다. 제3금융권에서 빌린 3000만원도 그대로였다.


남의 이름으로 계약직 취업

지난 2월, 공무원이던 민수씨 어머니(58)는 명예퇴직을 했다. 대출이자를 더 미루면 어머니까지 신용불량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명예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급하게 결정한 것이다. 퇴직금 1억여 원도 남편 때문에 얻은 연금담보대출금과 공무원신용대출금을 갚는 데 다 썼다. 남편 회사 보증을 서는 바람에 지난 5년 동안 월급의 절반을 차압당하기도 했다.

민수씨 가족은 채무로 인해 친·인척 관계도 모두 끊어졌다. 명절이 돼도 인사를 하러 갈 수 없다. 민수씨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위축된다고 했다. 느닷없이 눈물이 터지는 일도 잦아졌다. 민수씨는 “내게 이렇게 부담이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버지가 더 일찍 부도를 내는 게 좋았을걸…”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개인회생 절차를 알아보고 있다. 민수씨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한국을 떠나려 한다. 외국에 나가 이 땅에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타지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단다. 한국에서 다른 이의 이름으로 일터를 떠도는 그의 꿈이다.


ⓒ시사IN 윤무영학자금 대출 연체자에게 납부를 독촉하는 문자 메시지.
빚과 씨름하며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20대가 늘고 있다. 김씨처럼 부모의 빚을 떠안은 사례 외에 최근에는 학자금 대출 연체자가 급증하면서 대학생 신용불량자가 3만2902명에 이르렀다. 지난 3월26일 한국장학재단이 발표한 ‘학자금 연체 및 신용유의자 현황’에 따르면, 2008년 1만250명에 견줘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 등을 이용한 대학생까지 포함하면 20대 신용불량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은 원금이나 이자를 3개월 이상 연체하면 신용불량자로 등록하지만, 학자금 대출의 경우 6개월 이상 밀렸을 때 신용불량자로 등록한다.

지난해 서울의 한 사립대학을 졸업한 박경수씨(가명·28)는 졸업과 동시에 학자금 2200만원을 떠안았다. 집안 형편상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못한 박씨는 2003년 대학 입학 후 320만원씩 6회에 걸쳐 학자금을 대출받았다. 생활자금 1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매달 갚아야 하는 돈은 ‘산 너머 산’이었다. 첫 학자금 대출금은 320만원. 거치기간 5년 동안은 매달 대출이자만 2만원씩 갚았다. 하지만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해야 하는 2008년부터 부담이 커졌다. 원금과 이자를 동시에 갚아 나가면서 매달 20여 만원이 빠졌다. 해가 지날수록 학자금 대출금액이 쌓이고, 갚아야 할 이자와 원금도 늘어났다. 2011년 졸업할 즈음에는 매달 50여 만원을 상환해야 했다.

박씨는 이 돈을 갚기 위해 학기 중에도 일했다. 낮에는 학내 근로장학생을, 밤에는 외식업체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도 수입은 100만원이 채 안 됐다. 이 돈으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고, 30만원 방세를 내고, 생활비 30만원가량을 썼다. 그러나 졸업 이후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취업 준비를 하느라 근근이 생활비만 벌어 쓰게 돼 학자금 대출원금과 이자가 고스란히 밀린 것이다.

넉 달 후,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은행권에서 받은 학자금 대출에 대해 보증인으로 섰던 부모의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신용불량자로 등록돼 있던 부모는 박씨의 대출금을 갚아줄 여력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학자금을 갚아온 박씨는 결국 빚 1800만원을 등에 업은 채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이상훈씨(가명·28)도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경험이 있다. 지난 2003년, 서울의 한 사립대에 입학한 뒤 졸업할 때까지 두 번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대출금 800여 만원에 대한 이자는 5만원. 그러나 과외를 하며 생활하던 이씨로서는 방세 36만원·생활비 30만원을 대기도 버거웠다. 2007년, 4학년이 되어 취업 준비에 집중하면서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이씨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졸업 후 보습학원에 취직해 직장인 통장을 만들면서다. 은행에서는 ‘30만원 이하 소액이라도 3건 이상 연체되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고 설명했다. 2009년 초, 이씨는 사정이 나은 곳으로 이직한 뒤에야 학자금 대출이자와 원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뒤, 신용불량자 등록이 해제됐다.

이씨의 경우 지난 2월에 생긴 ‘채무상환유예’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신용불량자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이씨가 대기업이나 공기업 입사를 희망했다면 어땠을까? 한 은행 관계자는 “대기업은 신입 직원에게 신용정보를 확인하겠다는 확약서를 받는다. 신용이 불량하면, 입사를 검토하거나 보류한다”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송태경 사무처장은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다. 학자금 대출을 반복적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악성 채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의 대출 문턱도 너무 높다고 지적했다. 시중은행에서 요구하는 대출 기준을 20대가 충족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20대들이 무분별한 대부업체 광고에 노출되면서 쉽게 대부업체에 손을 댈 우려가 있다. 고금리인 저축은행과 대부업체에 손을 내밀고 나면 빚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20대 신용불량자 증가가 개인의 불행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적 손실도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 양일남 서민금융총괄팀장은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20대가 신용불량자 상태가 되면, 경제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린다”라고 말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상구 사무처장은 “20대에 가계부채가 많으면, 향후 진로를 계획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송태경 사무처장은 정상적으로 갚을 능력이 없다면, ‘거기서 멈추고 그 시점에서 수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긴급한 자금을 막기 위해 고금리 대출로 돌려막기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빚을 감내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얘기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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