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해 충북 음성의 노인복지관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요. 그는 그야말로 강렬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처럼 굴복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가 싸우는 대상이 가난이든 전쟁이든 농사든 말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손이었습니다. 열 손가락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동을 했음 을, 일찌감치 학교에 다니지 못했음을, 바로 그 때문에 어린아이임을 포기하고 일찍부터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음을, 책과 연필을 잡는 대신 전쟁에 나가서 무기를 들어봤음을, 낫과 나뭇가지에 수차례 찢겨봤음을, 지난여름 내내 뙤약볕 아래에서 일했음을, 이제 막 낟알을 떨었음을, 오늘도 평생 하던 일을 계속했음을, 그리고 오랫동안 그의 무기이자 삶의 도구는 손 하나였음을. 나무는 나이테로 자기의 나이를 알린다고 하는데 할아버지의 손에도 나이테가 있었습니다.
검버섯, 상처, 저항하듯이 솟아오른 뼈, 관절과 혈관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와 능선. 단테는 울고 있는 발, 즉 발이 울 수 있음에 대해 〈신곡〉에서 썼는데요. 저는 ‘울고 있는 손’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들고 바로 그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책을 찾아낸 거지요. 오래된 책의 검은 글씨를 손톱에 검은 때가 낀 손가락으로 짚어볼 때, 글씨와 때는 서로 잡고 있는 두 손 같았습니다.
서울 통의동 좁은 골목 안에 있는 류가헌갤러리에서 임종진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그 사진전의 제목은 ‘어머니’입니다. 그 사진 속에도 어머니들의 손이 있습니다. 어머니들의 손은 뭔가를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아이들 손일 때도 있고 자기 손일 때도 있고 지게일 때도 있고 잡초일 때도 있고 광주리일 때도 있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이 뭔가를 부스러져라 잡고 있다면 그건 자식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사랑 때문이겠죠. 우린 어머니들의 그 손을 보고 당신은 어디다 운명을 걸었나요?라고 감히 질문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들은 그 억센 갈고리 같은 손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부드럽게 쓰다듬었을까요? 한 어머니의 손은 죽은 딸의 무덤 위 잔디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녀의 손은 잔디에 가려 손목만 보입니다.
딸의 무덤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
임종진이 그 사진을 찍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임종진은 서른다섯에 죽은 한 노동 열사의 장례식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임종진은 우연히 혼자 마석 모란공원에 다시 갑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보았던 바로 그 어머니가 찬바람 속에 딸의 무덤을 쓰다듬으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종진은 가까이 가서 말을 붙일 수도 없었고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손목에는 그녀의 이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굵은 주름이 보입니다.
저는 손에 대한 이런 글귀를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깨나 허벅지에 놓여 있는 손은 더 이상 원래 그 손이 딸린 육체의 것이 아니다. 이 손과 손이 어루만지거나 붙잡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물이, 이름도 없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사물 하나가 더 생겨나는 것이다.”
사진 속의 손, 내가 모르는 손, 내가 아는 손. 손목의 맥박들은 대체 왜 뛰는 걸까요? 우리의 손을 부르는 펄떡거리는 신호 아닐까요?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을 때 하나의 새로운 손, 새로운 세계가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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