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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녹아든 공정무역의 달콤함

아이쿱생협이 필리핀 현지에 공정무역 설탕 공장을 세웠다. 한국의 생협이 공정무역 생산지에 공장을 건립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공장 건립으로 사탕수수 농민의 삶이 한층 나아질 수 있게 되었다.

필리핀 벨리슨·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2012년 01월 06일 금요일 제2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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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필리핀의 ‘겨울’이라고 했다. 유학생 김정인씨가 말하기를, 비교적 덜 더운 날씨라 했지만 기온은 30℃를 오르내렸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흘렀다. 땡볕에 그늘 하나 없다. 필리핀 농부 대여섯 명이 이제 막 도착한 4t 트럭에서 사탕수수 더미를 부리고 있었다. 이 사탕수수에서 착즙해 필리핀 재래식 설탕인 ‘마스코바도(Mascobado)’를 만든다. 갈색으로 사탕수수 향이 난다. 예전에 부자들이 이 설탕을 먹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먹는 설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마스코바도는 ‘근육(머슬)’을 뜻하는 스페인 말에서 온 단어. 스페인 식민지를 거치면서 이 단어가 안착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려면 밭을 서너 번 갈아야 한다. 벼농사보다 수확하는 노동도 고되다. 사탕수수에서 착즙해 이를 여러 차례 끓여 농도를 높인다. 그리고 즙을 짜고 남은 찌꺼기 ‘바가스’를 땔감으로 사용한다. 사탕수수 즙이 걸쭉해지면 스테인리스 판 위에 올려 30~40분 동안 써레질을 한다. 신기하게도 설탕 결정이 생긴다. 후끈한 열기에 작업하는 인부들의 등이 땀으로 젖었다. 아이쿱(iCOOP)생협이 공정무역을 위해 ‘마스코바도’ 공장을 완공한 지난 12월8일, 필리핀 파나이 섬 벨리슨 지역 풍경이다.

   
 


아이쿱생협이 공정무역을 시작한 것은 2007년 12월. 처음에 동티모르에서 원두커피 티백을 수입했다. 생활협동조합이 외국산 작물을 수입해야 하나. 조합원 사이에 논란도 있었다. 국내에서 생산하기 어려운 작물을 “어차피 수입할 것이라면 공정무역을 통해서 들여오자”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2008년부터는 필리핀의 PFTC(파나이 공정무역센터)로부터 ‘마스코바도’를 수입했다. 올해 100여t을 들여왔다. 공정무역을 시작하면서 생협의 고민은 계속됐다. ‘윤리적 소비를 통해 제3세계 농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을까?’

아이쿱생협은 필리핀에 ‘마스코바도’ 공장 건립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파나이 섬의 앤티크 지역으로 결정했다. 파나이 섬은 필리핀에서 두 번째로 빈곤율이 높은 지역. 앤티크는 1800년대부터 마스코바도를 생산해왔다. 


필리핀과 한국 협동조합 간에 연대


필리핀에는 300여 개 마스코바도 공장이 있는데 150여 개 공장이 파나이 섬에 있다. 사탕수수 농민 40%가 이곳에 거주한다. 하지만 이 지역의 마스코바도는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시설과 기술이 떨어져 설탕 입자가 곱지 못했다. 국제 수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주로 필리핀 내수로 사용되었다.


   
ⓒ시사IN 차형석
사탕수수를 먹고 있는 앤티크 지역 아이들.


아이쿱생협은 2010년 10월 조합원·생산자·직원 모금을 했다. 7100여 명이 모금에 참여해 1억8000여 만원을 모았다. 공장 건립 비용은 아이쿱생협이 대고, 현대식 공장 운영 경험이 많은 PFTC가 기술 지원과 교육 훈련, 수출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한국의 생협이 공정무역 생산지에 공장 건립을 지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협동조합 간에 협동하는 것을 협동조합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이번 공장 준공은 필리핀 생산자 협동조합과 한국의 소비자 협동조합 간의 연대로 기록될 만하다.

사탕수수 공장이 건립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일종의 협동조합인 AFTC(앤티크 공정무역센터)를 만들었다. 3㏊(3만㎡) 미만 토지를 소유한 소농이나 소작농만 가입할 수 있다. 현재 56가구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한 조합원의 집을 방문했다. 재닛 에스코티 씨는 성인 두 명이 누우면 이내 찰 것 같은 작은 대나무집에 산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 집에서 여섯 살 큰딸, 세 살 아들, 한 살짜리 둘째 딸아이와 함께. 이 가족은 1㏊도 안 되는 땅을 소작한다. 소작인은 지주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내놓아야 한다. 이들 가족의 1년 수입은 5만 페소가량. 우리 돈으로 130만원 정도다. 앤티크에는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가는 아이가 많다. 학교를 못 간 아이들은 공용어인 영어를 배우지 못해 변변한 직장을 얻기 힘들다. 에스코티 씨는 올해 6월부터 큰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남편이 마스코바도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수입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탕수수가 우리 가족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차형석
파나이 섬에 있는 마스코바도 공장.


기존 마스코바도는 50㎏당 1200페소(약 3만1000원)에 거래된다. 새 공장에서 만든 마스코바도는 2175페소(5만6000원)를 받게 된다. 사탕수수 재배 소농가들은 가격을 후려치는 상인에게 착취당하는 일 없이 정당한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고, 판로를 확보할 수 있다. 아이쿱생협 또한 물량이 달렸던 마스코바도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공장 준공식 날, 마을 주민 150여 명이 참석해 ‘마을 잔치’를 벌인 것도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다.

앤티크 공장 이전에 파나이 섬에는 모델이 있었다. 다봉(Dabong) 지역은 앤티크가 바라는 미래상이다. PFTC의 생산자 협동조합 카마다(KAMADA)는 이탈리아 공정무역 단체가 지은 두 개 공장에서 마스코바도를 생산한다. 1997년부터 공장이 가동되었고, 82가구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공정무역 덕에 생활 나아져”


언뜻 보기에도 다봉 지역은 앤티크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 보였다. 여성 농민 프레실라 피사시코 씨는 ‘공정무역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녀 가족은 1㏊에 벼를, 1㏊에 사탕수수를 키운다. 한 해 소득은 16만 페소(약 416만원)가량 된다. 같은 면적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도 조합원들이 더 많은 소득을 얻는다고 한다. 조합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녀는 “협동조합에 가입하고서 생활 수준이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몇 년 전에는 여덟 식구가 살던 대나무집 옆에 콘크리트 집을 지었다.


   
ⓒ아이쿱생협 제공
12월8일 마스코바도 공장 준공식 직후 아이쿱생협 조합원들과 마을 주민이 기념촬영을 했다.


앤티크의 공장 벽에는 ‘Fair Trade is Life. Fair Trade is Hope. Fair Trade is susta– inable Income and Prosperity(공정무역은 삶이고, 희망이고, 지속 가능한 수입과 번영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의 시골 마을처럼 필리핀 농민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흥겨운 마을 잔치를 벌였다. 농민, 주부, 치과의사, 교사 등 추첨을 통해 준공식에 참여하게 된 모금 참여 조합원들과 아이쿱생협 직원 13명은 미리 연습해간 노래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을 합창했다. 순천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농민 조성규씨는 “농민의 마음을 잘 안다. 이 공장을 중심으로 협동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교사인 조합원 김말다씨는 “내가 낸 작은 돈이 이런 뿌듯한 결과를 낳다니. 이런 게 윤리적 소비구나 하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공정무역은 타인에게 희망이 되는 소비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다. 앤티크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처럼, “공정무역, 마부 하이(mabuhay)”. 필리핀 말로 환영한다는 뜻이고, 오랫동안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이 취재는 아이쿱(iCOOP)생협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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