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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주권을 포기한 처절한 대가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는 유로존 때문이다. 경제력이 다른 나라들이 한 통화권에 묶이면 약한 나라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심화되는 재정적자를 통화정책으로 메울 수도 없다.

여경훈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연구원)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제2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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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발 경제위기, 세계경제 덮치나
① 재정위기냐 유로 위기냐
② 긴축이 재정문제 해법이라고?
③ 엇갈리는 유로존의 운명
④ 한국 경제와 한·미 FTA, 어떤 영향 받나?


유럽발 경제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리스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로 남유럽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 나라)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번지고 있다. 유로존 최우량국인 독일까지도 최근 국채 판매율이 역대 최저를 기록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문제는 유럽발 경제위기가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경제로 번질 위험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글로벌 경제 빙하기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비관 섞인 예측까지 나온다. 이에 <시사IN>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과 함께 유럽발 경제위기의 구조 및 해법을 점검하는 시리즈를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한국 경제와 한·미 FTA에 던지는 시사점도 짚어본다.


   
ⓒReuter=Newsis
희망 속에 출범한 유로존이 흔들리고 있다. 위는 2006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유럽연합 가입 기념식이 치러지기 직전 유럽연합기가 올라가는 모습.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프린스턴 대학)는 지난 7월14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유럽 위기의 퍼즐’은 자신도 규명하기 어렵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과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일본의 10년 국채 금리는 1.09%인 데 비해 이탈리아는 5.76%에 달한다. 실제 나는 이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풀어야 할 중요한 퍼즐이다.”

지금 남유럽 위기는 흔히 재정위기로 간주된다. 위기가 나타나는 방식은 남유럽 국가들이 발행하는 국채 금리가 폭등하는 것이다. 금리가 너무 높아서 이 나라 정부들이 자금을 빌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남유럽 이탈리아나 일본이나 고령화, 과다한 정부 부채 등 겪고 있는 상황은 비슷하다. 더욱이 일본은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200%가 넘지만 이탈리아는 그 절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장의 압력에 총리가 사임할 정도로 이탈리아의 금융 상황은 심각하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재정적자 문제는 스페인보다 훨씬 심각하다. 하지만 영국의 국채 금리는 2% 미만에 불과하다. 스페인은 이미 6%를 넘어섰다. 그리고 스페인 또한 정권이 교체되었다.

왜 그런 것일까. 노벨경제학상의 권위가 무색하게 크루그먼은 4개월이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퍼즐을 풀어낸다. “유로화 체제에 들어감으로써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의 통화로 빌려야 하는 제3세계 국가와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유로 지역 국가들은 금융시장에 위기 상황이 닥쳐도 자국의 통화를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국채시장의 자금 조달 경로가 붕괴되었다.”

무슨 말인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유로 표시 국채를 발행한다. 이는 통화정책을 통해서 국채 금리를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남유럽 국가들은 단일통화인 유로화를 채택함으로써 통화 및 환율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국채시장에서 운신의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이는 연방국가인 미국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AP Photo
노벨상 수상자도 쩔쩔맨 유로 퍼즐


미국도 연방정부 재정적자 이상으로 주 정부 재정위기가 심각하다. 하지만 미국의 연방정부는 GDP의 20%에 달하는 예산을 재정위기에 직면한 주 정부에 지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럽의회 예산은 유럽연합(EU) 지역 GDP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회원 국가가 재정위기에 빠져도 이를 지원할 수 없다. 즉, 미국 주 정부의 재정위기는 연방정부가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 그러나 EU의 주 정부라 할 수 있는 회원국들에 재정위기가 발생하면 각 나라가 개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유럽위기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첫째 원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낸 뒤 이 달러로 연방정부의 국채를 매입해준다. 이렇게 통화를 늘리는 방법을 양적 완화라고 한다. 이러니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국채의 이자비용도 낮게 유지할 수 있다. 일본과 영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로 지역은 다르다. 유로 지역의 중앙은행으로서 유로화 발행 권한을 가지는 기관은 유럽중앙은행이다. 그런데 유럽중앙은행은 ‘구제금융 금지 조항(리스본 조약 제125조)’ 때문에 원칙적으로 회원국의 국채를 매입할 수 없다. 즉, 유로 지역의 회원국은 국채를 인수해줄 자국 고유의 중앙은행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로 회원국은 적어도 돈을 빌리는 처지에서는 민간 기업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시장 논리에 따라 이자를 내야 한다. 국채 금리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도 대책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물론 그리스 위기가 깊어지기 시작한 2010년 5월부터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 국채를 사주는, 채권매입 프로그램(Securities Market Programme)을 추진 중이다. 최근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위기가 확산되자 다시 이 나라들의 국채를 매입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매입한 총액이 2000억 유로에 불과해 위기를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1, 2차 양적 완화를 통해 2조 달러가 넘는 채권을 매입했고 적어도 2013년 중반까지 제로 금리를 유지하겠다고 천명한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AP Photo
11월24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긴축정책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자들.


그 결과 최근 그리스·포르투갈은 물론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가 4% 수준에서 2% 포인트 이상 상승해 7% 가까이로 치솟고 있다. 금리가 1%만 상승해도 연간 80억 달러 상당의 이자비용이 증가한다. 또한 금리가 오르면 국채 가격이 하락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 정부나 금융기관, 민간기업 등은 국채를 자본금(일종의 ‘자기 재산’)으로 갖고 있는데, 이 자본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채가 늘어나는데 이처럼 ‘자기 재산’은 작아지니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따라서 유럽·미국·일본의 기관 투자가들은 자신이 보유한 남유럽 국채에 대해 ‘팔자’ 주문을 쏟아내게 된다. 뱅크런(Bank Run)과 비슷하게 이른바 국채런(Bond Run)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신용부도 스와프(CDS)의 투기적 거래는 국채시장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이것이 남유럽 위기의 현주소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 중심국으로 위기가 확산되는 조짐이 뚜렷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채 금리도 최근 3.5%까지 상승했다. ‘유로존 붕괴 리스크’가 이 나라들의 국채시장에도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프랑스나 독일 정부가 자국의 은행 및 유로화를 방어하기 위해 구제금융에 나서면 이 나라들의 신용등급까지 강등하겠다고 위협 중이다.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매입 개입에 따라 국채 금리가 하락하면 시장이 안정을 찾고, 다시 금리가 상승하면 시장이 불안에 떠는 것도 유로체제의 본질적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지금 유럽의 위기는 유로화에 갇혀 있는 국채시장이 나라별로 차례로 붕괴되면서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확산되는 중이다.

   
 


약한 고리가 붕괴되며 중심부까지

그런데 유로 채권시장의 붕괴 뒤에는 이를 촉발한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회원국 간 경상수지 불균형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사실이다. 유로 17개국을 하나로 보면, 2010년 GDP 대비 0.1% 수준의 흑자를 이룰 만큼 경상수지는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경상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로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회원국별로 보면 그렇지 않다. 통화 통합 이후 독일 같은 제조업 왕국과 남유럽 국가들 간 국제 경쟁력의 차이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왔다. 만약 남유럽 국가들이 자국 통화를 가지고 있다면 통화 가치를 내려 수출을 늘려야 경상수지 적자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일통화를 채택한 상황이라 남유럽 국가들의 통화가치 절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나라들의 적자는 계속 증가하는 반면 제조업 강국인 독일·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의 흑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독일의 경우 1990년 통일 이후 -1% 정도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으나, 유로화를 채택한 이후 2002년부터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해 현재 GDP의 5%가 넘는 막대한 흑자를 내고 있다.


강력한 정치적 결단, 가능할까


이처럼 환율 조작이 불가능해도 물가가 낮았다면 남유럽의 경상수지가 지금처럼 불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유럽의 물가는 높은 편이었고, 이 또한 유로화 시스템 때문이다.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남유럽 국가들에게 유로화 통합 이후 가장 큰 혜택이 있었다면 서유럽의 자금시장에 쉽게 접근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같은 통화를 사용하게 된 만큼 남유럽의 정부·기업·금융기관들은 이전보다 훨씬 싼 금리로 유로화를 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남유럽 각국 정부는 싼 금리로 국채를 발행하고 이렇게 빌린 돈으로 재정지출을 늘렸다. 금융기관들은 마음껏 자금을 확보해서 각종 ‘돈 장사’를 풍성하게 벌였다. 덕분에 금리가 지속적으로 인하되고 이는 투자 및 소비 수요를 진작시켜 이른바 ‘저금리 특수’가 발생했다. 또한 이는 전반적인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거품이 꺼지고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러한 순환은 끝나게 되고 감춰졌던 유로 체제의 약점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위기는 이미 일시적인 복지 지출 축소나 유동성 공급으로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렸다. 유로 단일 통화체제가 지니는 근원적인 제약성이 국채시장의 붕괴를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상수지 불균형이 확대되는 한 남유럽 국가들이 국채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문제 해결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위기는 눈앞에 있는데 재정통합이나 경상수지 조정과 같은 해법은 긴 시간을 요하는 과제다. 남은 길은 강력한 정치적 결단일 텐데 정권이 잇따라 바뀌는 지금도 정치력은 복원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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