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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어떻게 복지국가가 되었나?

비그포르스는 새로운 불황 처방 제시, 휴머니즘과 경제성장의 결합, 수구 정당과의 타협, 자본과의 대타협 등을 통해 스웨덴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1년 06월 27일 월요일 제1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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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번영과 처참한 몰락의 연대였던 1920년대(1929년 뉴욕 증시 폭락 이후 대공황). 당시의 ‘정통파’ 좌우 이데올로기인 시장자유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각축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고방식과 정치 연합 창출로 이후 수십 년 동안 ‘황금시대’를 만들어낸 나라가 있다. 이 작은 ‘변방국’ 스웨덴의 진보 정치를 이끌어간 주인공이 사회민주당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이다.


‘정통 우파’를 넘어 새로운 불황 처방을 제시하다:불황의 조짐이 현저하던 1920년대 말, ‘정통파’ 시장자유주의 노선의 대안은 임금과 물가를 낮추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호황과 불황을 되풀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 그렇다면 불황의 대안은 더 심한 불황이었다. 실업자가 넘치고 상품이 팔리지 않아 임금 및 물가가 빨리 그리고 충분히 떨어지도록 둬야 한다는 것. 그래야 기업가들은 다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자재를 매입해 생산을 재개할 터였다. 불황을 넘기면 ‘자연스럽게’ 호황 국면이 도래할 것이니까 정부는 그냥 뒷짐 지고 있으라는 것. 이에 반해 또 다른 ‘정통파’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자 혁명으로 자본가를 타도하고 전체 산업시설을 국유화하자고 했다. 


   
ⓒwikipedia
19세기 말 스웨덴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스웨덴 우파 정부는 정통 시장자유주의의 우등생들이었다. 실업률이 30%에 달하고 임금 수준이 공황 이전의 80%밖에 안 되는데도 임금을 더 내리자는 식이었다. 심지어 스웨덴 경총(SAF)은 “임금 수준이 최소한 20%는 더 떨어져야 경기가 회복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1930년 가을, 야당인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이자 재무장관을 지낸 48세의 비그포르스는 ‘위기 안정화 프로그램’을 들고 의회 단상에 선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말한다. ‘쉬는 노동자, 자본(돈), 원자재 등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다만 자본 투자로 노동자들을 공장에 넣어 유용한 제품을 생산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 우리 사회민주당은 이런 체제를 참을 수 없다. …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야말로 필연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떠들어도 우리는 이를 거부할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불황은 숙명’이라는 당대의 정통파 이론을 거부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거부’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사회민주당과 비그포르스가 다른 정치 세력과 달랐던 점은 혁신적인 정책을 가지고 나섰다는 것. 이 ‘위기 안정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자본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빚을 내서라도 대신 투자하자는 내용이다. 국가가 주관하는 공공사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 부문의 임금을 일반 기업 수준까지 높이자는 것. 국가가 돈 100크로나를 임금으로 지급하면, 그 돈은 실업 노동자→소매점→기업으로 흐르는 과정에서 수백 크로나 규모의 유효수요로 불어나고, 이는 기업의 생산을 활성화해서 다시 고용을 창출할 것이었다.

이는 21세기 한국인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풍미한 케인스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수요 창출 정책’이기 때문. 그러나 1930년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이었고, 경악할 만한 포퓰리즘이었다. 수요 창출 정책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케인스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은 비그포르스의 연설로부터 6년 정도 후인 1936년에야 출간된다. 


   
사회 민주화와 정치 민주화를 경제 민주화로 완료하자는 스웨덴 노총의 포스터(왼쪽). 오른쪽은 노동자들이 역사의 발전 시계를 ‘복지 정치’로 가속화하자는 사민당 포스터.
당시 정통파 시장자유주의는 ‘실업은 어쩔 수 없다’며 시민에게 절망과 체념을 설교했다. 이에 대해 스웨덴 진보 정치는, ‘인간의 집단적 노력으로 실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대담한 희망을 제시했다. 덕분에 1932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집권에 성공하고, 스웨덴은 케인스 것으로 알려진 ‘수요 창출 정책’을 세계 최초로 집행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공적 지출은 낭비’라는 당시의 상식(한국은 지금도 마찬가지)이 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휴머니즘과 경제성장을 결합시키다
:1932년 총선에서 스웨덴 사민당의 승리는 또 하나의 ‘정통’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극복한 덕분이기도 하다. 사민당은 당시 세계 노동자 정당의 공통된 목표였던 산업 국유화 노선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오히려 비그포르스는 경제성장과 효율성·시장을 크게 중시했다. “(경제성장으로) 증가된 생산은 합리적 방법으로 분배되기만 하면 전체 시민에게 더 높은 생활수준을 부여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 사민주의자들은, 무언가를 분배하려면 그 ‘무언가’가 이미 생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비그포르스는 분배와 생산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국유화를 승인할 수 없었다. 이를 강행할 경우 극심해질 정치적 혼란과 국가 조직의 비대화도 문제였다. 그래서 비그포르스가 내세운 대안은 ‘경제 계획’(시장과 국가 개입을 조율해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과 복지제도였다.

비그포르스에게 복지제도는 ‘인간의 자유’를 고양하는 장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생산)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가다. 이들이 투자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아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투자를 중단하면 노동자들은 생계까지 위협받게 된다. 이런 자본의 변덕 앞에서 노동자들은 자유롭지 않다. 이런 상태에 놓인 노동자·시민의 ‘기본적 사회적 삶’을 보장(복지)해서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이 비그포르스 등의 아이디어였다. 더욱이 복지는 출산과 교육을 통해 자본이 원하는 ‘인적 자원’을 키우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길이기도 하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이렇게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의 두뇌 속에서는 휴머니즘과 경제성장이 통합되어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제자인 루돌프 마이드너(왼쪽)와 사민당과 ‘암소 협상’을 타결시킨 농민당 브람스톨프.
‘복지국가’는 재분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비그포르스의 사상은 사회민주당의 기층 조직인 스웨덴 노총(LO)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중·후반에 LO는 이미 스웨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노사 관계를 착취-피착취의 구도로만 바라보던 당시(와 현재)의 좌파 관점에서는 틀림없는 배신이다. 그러나 수출로 먹고사는 스웨덴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질 경우 소속 노동자가 장기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도 명약관화했다. LO는 이에 주목한 것이다. 

더욱이 사민당과 LO는 국제경쟁력을 위해 생산조직 합리화와 산업구조 고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노동운동이 협력하려면, 산업 합리화 과정에서 노동자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비그포르스는 ‘안정화 프로그램’에서 ‘산업 평화’를 유지하는 대신 일자리를 잃었을 때 배치되는 공공사업장의 임금을 일반 기업 수준으로 올리고, 노동운동 측이 관리하는 고용보험 제도를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스웨덴 사민당과 LO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에 대한 기본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이디어는 비그포르스의 제자인 루돌프 마이드너 등에 의해 1950년대 이후 정책화한다. 그런데 같은 노동에 같은 임금을 준다는 것은, 효율성 높은 기업은 이익을 보는 반면 효율성 낮은 기업은 ‘사업을 그만두라’는 이야기다. 잘나가는 기업을 지원하는 대신 한계 기업은 퇴출시켜 국민경제 전반을 고도화하기 위한 정책. 그리고 퇴출된 기업의 노동자에게는 후한 고용보험을 제공하는 한편 국가가 책임지고 재교육해 고효율 기업이나 새로운 산업에 취업시킨다.

이처럼 ‘복지국가’는 단순히 재분배(이른바 2차 분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나친 임금 격차를 차단해 노동자 집단의 단결을 고취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투자와 생산을 끊임없이 재구조화해서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높이는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수파’를 형성하기 위해 ‘수구’ 정당과 타협하다
:이런 ‘사상 혁신’에 힘입어 사민당이 1932년 선거에서 거둔 득표율은 41.7%였다. 비그포르스는 다시 재무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공약을 시행할 수 없었다. 보유 의석이 과반수에 못 미치는 소수파 정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사회 갈등이 격렬한 ‘파업과 보이콧, 폐업의 땅’이었다. 사회 세력들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왕정 지지 세력과 사양산업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당, 그리고 농민당은 민주주의 자체에 반감이 큰 복고주의자들이었다. 자유당은 당시의 첨단기술을 기반으로 한 수출 대기업들(에릭슨·일렉트로룩스 등)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대기업 뒤에는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발렌베리 가문이 있었다.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형태다. 사민당도 비그포르스 같은 ‘개량주의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갈라져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1920년대 말 탈당해서 공산당을 결성한다.

이들 정당은 자유무역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대립한다. 한국의 진보 세력과 달리 당시 스웨덴 사회민주당 당론은 자유무역이었다. 그래야 노동자가 싼 가격으로 농산품 등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을 터였다. 자유당은 수출 대기업이 지지 기반인 만큼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보수당과 농민당은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특히 농민당은 수입 농산품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정책으로 식량 가격을 높게 유지하려 했는데, 반(反)사민주의 성향이 보수당보다 더 강한 ‘수구(守舊)’ 정당이었다. 심지어 친독파로 히틀러에게 호의적인 ‘종(從) 히틀러’파이기도 했다. 사민당이 농산물 수입 제한을 반대했다면, 농민당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공공사업 계획을 거부했다.


   
ⓒ스웨덴 노동운동 아카이브 도서관
1938년 스웨덴 노총 대표와 경총 대표가 잘츠요바덴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공약을 지키려면 사민당은 다수파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처음에는 자유당에 손을 내밀었다. 사민당과 자유당은 이미 1910년대 말에 연대해 ‘반봉건 민주화 혁명’을 성공시킨 바 있다. 그러나 자유당은 ‘위기 안정화 프로그램’이 인플레이션, 국유화, 재정 파탄, 노동시장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연정을 거부했다. 당시 비그포르스는 친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민당 정부가 언제까지 존속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썼다. 결국 마지막 남은 비상구는 농민당이었다. 비그포르스는 농민당 수뇌부와 접촉하며 노동자(사회민주당)와 농민(농민당)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설득한다. “공공사업으로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확대되면 농산품에 대한 수요 역시 증가한다. 농민당은 노동자들의 이익이 농업에도 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33년 5월 말 사민당과 농민당은 이른바 ‘암소 타협(cow deal)’에 성공해 다수파 정부를 구성한다. 이를 위해 사민당은 일부 ‘원칙’을 포기한다. 농민당 요구대로 농산물 수입을 제한해 버터·밀크 따위의 가격 인하를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스웨덴에서 사상 최초의 ‘노농(勞農) 동맹’으로, 덕분에 사민당은 공약을 실천할 수 있었다. 암소 타협은, 사민당이 차이보다 동일성을, 오래된 편견과 혐오감보다 객관적 이해관계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스웨덴의 황금시대’를 열어젖힌 쾌거였다. 

자본과의 대타협으로 구성한 스웨덴 모델
:암소 타협 이후 스웨덴은 순항한다. 국민소득이 급격히 증가하고 실업률은 매우 떨어진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사민당은 1936년 46% 득표율로 재집권하고 다시 농민당과 다수파 정부를 구성한다. 자신감을 얻은 비그포르스는 1938년 정부와 산업계의 토론을 제안한다. “노동운동도 자본가들도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누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 효율성 증대라는 공동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국내 진보 성향 언론들은 ‘스웨덴 재벌은 착한 재벌, 한국 재벌은 나쁜 재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본의 속성은 시공간을 관통해서 비슷한 측면이 있는 모양이다.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 예상되자 비로소 발렌베리 등 대자본이 사민당의 손을 잡는다. 휴양지 샬트셰바덴에서 노·사·정 사이에 대타협이 이뤄진다. 이 협정에서 사민당(과 LO)과 산업자본 측은 공동의 이익을 확인하고 ‘몇 가지’를 교환한다. 대자본 측은 높은 노동비용(고임금과 복지국가로 인한), 완전고용을 위한 재정지출 등을 수용한다. 그러나 대자본이 얻은 것도 적지 않은데, 무엇보다 산하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 유지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개방경제(수출 대기업에 유리) 및 노사 평화도 대자본이 바라던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스웨덴의 노동쟁의 건수는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비그포르스는 ‘안정화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사민당 내 좌파 세력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파 정당들의 유해한 노선에 욕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구체적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 정책은 시민에게 사민당이 우파 정당과 마찬가지로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역사는 비그포르스의 발언을 입증했고, 이렇게 형성된 사민당의 헤게모니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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