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산 유기농 오이 파동이 독일을 강타하고 있다. 6월1일 현재 총 15명이 이 오이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EHEC 대장균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새로운 에너지 정책을 발표한 지난 5월30일, 확산 일로의 이 대장균 공포는 더 이상 뉴스의 헤드라인이 아니었다. 모든 언론과 방송은 메르켈 정부가 정치적 수치를 감내하며 발표한 2022년 원전 폐기 결정을 매우 진지하게 전하면서 이를 분석하기에 바빴다.

사실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가을, 2022년 이전에 원전을 폐기하는 것으로 확정했던 기존 원자력법을 개정해 평균 12년의 수명 연장을 밀고 나간 장본인이다. 총선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원전과 작별하기를 바라는 국민 대다수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이다. 결국 독일 정부는 대규모 반핵 집회의 집중포화를 피할 수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슈투트가르트 인근에 위치한 네카베스트하임 원자력발전소는 지난해 말 35세를 일기로 폐쇄되어야 했다. 메르켈 총리의 수명 연장 덕분에 이 발전소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지난 3월12일,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 6만명은 장장 45㎞의 인간 띠를 만들어 늙은 발전소의 조속한 폐쇄를 요구했다.

독일 시민들이 인간 띠를 만들고 있던 그 시각, 후쿠시마발 재앙 소식이 전파를 타고 독일에도 상륙했다. 시민들은 주저하지 않고 거리로 나왔다. 3월14일 전국적으로 11만명이 각자의 지역에서 후쿠시마를 위로하고 원전의 조속한 폐쇄를 요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메르켈 총리는 노후한 원전 7기를 즉각 폐쇄하겠다고 발표하며 반핵 여론을 잠재우려 했지만, 지난가을 수명 연장 결정을 지켜봤던 독일인들은 이를 정치적인 권모술수로 파악했다. 3월26일 대도시 4곳에서 열린 반핵 집회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25만명이 모였다. 


ⓒAP Photo독일 북부 비블리스(Biblis)의 원전 앞에서 4월25일 시위자들이 ‘원자력? 됐거든요’라고 적힌 깃발을 꽂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메르켈 총리를 그로기 상태로 만든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지방선거가 있었다. 이곳은 1953년 이후 지금까지 줄곧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이 정권을 잡았던, 그야말로 기민당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선거 직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민들은 원활한 철도 통행을 위해 주도(州都)인 슈투트가르트의 오래된 역사를 없애고 새로운 형태의 중앙역을 짓는 ‘슈투트가르트 21’ 프로젝트의 일방적인 추진으로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여기에 후쿠시마 사태가 겹치면서 환경·에너지 정책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투표 행태가 이뤄지고, 그 결과가 독일 역사상 최초의 녹색당 주지사 선출로 이어졌다.

원전 8기, 메르켈 덕에 수명 1~7년 늘어

이에 메르켈 총리는 그 이름도 희한한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출범시킨다.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서 나타날 수 있는 사회문제를 살펴보고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물론 핵심은 독일 내 원자력발전소와 관련한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전문가의 권위를 빌려 해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었다. 성직자·대학교수·원로 정치인·재계 인사 등 총 17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8주간 활동한 후 5월 말 그 결과를 연방정부에 제출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5월30일, 마침내 그날이 온 것이다.

위원회의 최종 결과 보고서를 받아든 메르켈 총리는 내각을 소집해 장고에 들어갔다. 무려 7시간을 토론했다고 한다. 사실 이 위원회는 출범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원전 정책 유지를 위해 애꿎은 외부 전문가를 불러 결국 정부가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녹색당은 이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같은 의심 속에 출범한 위원회가 2021년까지 원전을 폐쇄하라고 위원회를 구성한 당사자인 메르켈 본인에게 권고하고 나선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결국 1년이라는 완충 기간을 두고 2022년까지 원전을 완전 폐쇄하는 것을 정부 정책으로 결정했다. 지난해 원전 수명 연장 당시 이를 반대하던 야당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 빈축을 샀던 뢰트겐 환경부 장관은, 이번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번 결정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목에 힘을 줬다.

이번 결과를 독일 내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녹색당이나 환경단체는 민심을 돌려보려는 메르켈의 꼼수라고 혹평한다. 더 일찍 폐쇄해야 할 원전을 2021년까지 운전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해준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그라펜하인펠트 발전소는 적녹연정 결정 당시 2014년 폐쇄될 예정이었으나, 이번 결정으로 2021년까지 운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 총 9기 중 8기를 놓고 볼 때 2002년 결정에 비해 1년에서 많게는 7년 동안 더 가동할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한 라디오 방송은 “예전에 있던 곳으로 우리 다시 돌아왔네”라며 이번 결정을 비꼬고 있다. 과거 적녹연정에서 2022년까지 원전을 폐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할 당시 메르켈의 기민당이 “가능한 한 빨리 이 결정을 폐기하겠다”라고 장담했으나,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코멘트와 함께이다.

독일의 전반적인 국정은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자민당 연정이 이끌고 있지만, 현재의 핵 정국은 녹색당이 이미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영방송 ARD는 ‘2011년 진행 중인 지방선거의 승리자는 단연 녹색당’이라고 간결하게 평했다. 녹색당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 당선에 이어, 5월22일 치러진 브레멘 주 선거에서는 기민당을 제치고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올 9월 치러질 수도 베를린의 지방선거는 사민당 출신 클라우스 포베라이트 현 시장과 녹색당 후보인 레나트 퀴나스트가 엎치락뒤치락 1위 다툼을 하고 있다.

핵폐기물 처리 문제도 복병

후쿠시마 재앙은 체르노빌 공포를 직접 체험했던 독일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악령을 다시 깨운 사건이다. 원전에 가장 우호적이었던 보수 정당까지 원전 폐기를 선언하게 되었으니, 만약 집권당이 바뀔 경우 그 시간표는 더욱 더 앞당겨질 것이 분명하다. 녹색당이나 사민당은 자신들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더 빠른 원전 폐기를 선거 캠페인으로 들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30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핵폐기물 처리라는 복병 또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중저준위 폐기물을 저장했던 아세 방폐장은 관리 소홀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며, 중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고어레벤은 1970년대 이래 폐기장으로 적합한지 여부를 놓고 여지껏 다투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번 메르켈 정부의 원전 폐기 결정은 논란의 종착역이 아니라, 그래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논란은 모든 원전이 문을 닫아야, 그리고 사고 위험 없고 안전한 핵폐기물 영구 처분장이 건설되어야만 끝날 수 있는 문제다. 그렇기에 이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모든 국가가 풀어야만 하는 실근(實根)을 찾기 매우 어려운,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매우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다.

기자명 염광희 (베를린 자유대학 환경정책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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