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준씨(필명·41)는 회사원이다. 그리고 저술가다. 하이닉스반도체 홍보팀에서 일하며 책을 쓰고, 책을 쓰며 일한다. 2006년에 첫 책 〈제국의 후예들〉을 펴냈다. 조선 왕실 후예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서 쓰게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료를 모으고 책의 구성에 골몰하는 것이 마냥 좋고 즐거웠다. 언뜻 ‘이것이 나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 책을 낸 이후로 정씨는 해마다 책을 한 권씩 펴냈다. 2007년에는 언론인 단체 관훈클럽을 통해 한국 언론사를 짚은 〈이야기 관훈클럽〉을 출판했다. 2008년에는 정씨가 가장 아낀다는 〈거인의 추억〉을 세상에 내놓았다. 야구 선수 ‘최동원 평전’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야구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운 야구 소년이었다. 롯데자이언츠 창단 어린이 회원이었던 것을 지금도 자랑으로 여긴다. 첫 책을 내기 전부터 이미 최동원 선수의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09년에는 소설가 이병주 평전 〈작가의 탄생〉을 썼다. 이병주의 소설 〈관부 연락선〉을 읽고 나서 ‘이병주 월드’에 빠져들었다. 이병주가 쓴 글이라면 사보에 실린 칼럼까지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지난해 〈마흔, 마운드에 서다〉를 상재했다. 사회인 야구를 시작하면서 틈틈이 기록해둔 야구팀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썼다. 각기 다른 주제의 책을 해마다 써내는 사람. 정범준씨는 ‘직장인 저술가’이다.     


ⓒ조우혜정범준씨는 주말에는 야구를 하고, 주중 저녁에는 살사 동호회에 나가 춤을 배운다.

취재 약속을 잡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수요일·목요일은 퇴근 후에 살사 연습을 하러 홍대 쪽으로 가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사회인 야구 시합이 잡혀 있다고 했다. 세상에,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살사까지! “뭐든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3월부터 다음 카페 살사 동호회 ‘보스톤’에서 살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범준씨, 해마다 한 권씩 42권 집필이 목표

“살사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살사가 꽤 어려워 몇 개월을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그래서 1주일에 무조건 2회 이상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성실(誠實)의 ‘성’자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으로 만들어졌다. 말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부터 그를 잘 아는 출판사 알렙의 조영남 대표는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 삼총사의 이름 가운데 한 글자씩 따서 필명을 정했다. 대학 시절 노래패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학교 생활은 심드렁했다. 단편소설을 써서 대학 문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글을 계속 쓸지는 자신하지 못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졸업 이후 취업이 쉽지 않았다. 3년을 놀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산에서 산불 감시하는 ‘공공 근로’를 하기도 했다. 2000년에 한 IT 잡지사에 취직했고, 그때부터 1년6개월쯤 일하고 두세 달 노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옮기는 직장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좋았다.


정범준씨(위)는 뭔가 ‘필’이 오면 전력질주한다. 야구도 그렇게 시작했다.정범준씨, 무엇을 썼나?〈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마흔, 마운드에 서다〉

한 출판사의 의뢰로 첫 책을 내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좋아서 하는 일, 즐겨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심했다. 해마다 책 한 권씩 쓰자고. 목표도 정했다. 42권을 쓰는 거다. 마라톤 42.195㎞를 뛰듯이. 그는 논픽션 작가로 유명해지면 한 해에 두 권씩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책 한 권을 못 쓰는 사람도 많은데, 그는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할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다. 평소에 자료를 틈틈이 모은다. 자료를 보다보면 쓰고 싶은 책 주제가 이어져 나온다. 자료를 모으고 나서는 대략 3개월 동안 글을 쓴다. 주로 겨울철에 글을 쓴다.”

왜 겨울철에 글을 쓰냐고? 겨울에는 야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야구 마니아이다. 야구를 보는 게 취미였다. 2008년 가을부터 사회인 야구에 뛰어들었다. 그가 책에 쓴 한 대목은 이렇다.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마흔을 앞둔 사내의 즐거움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설레고 울렁거리게 하는 일, 그러면서 즐거움과 행복함을 주는 일은 과연 없을까. 인생에서도 성적 오르가슴 같은, 그러니까 엑스터시를 느끼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야구를 시작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고 한다. 마운드에 서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는 뭔가 ‘필이 오면’ 그 길로 전력 질주한다. 10개월 동안 퇴근하고 나면 일주일에 두 차례씩 야구 교실로 가서 투수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토요팀 ‘터틀즈’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일요팀 ‘K드래곤즈’에서는 1루수로 나선다. 야구를 배우면서 틈틈이 야구 일기를 썼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그 튼실한 부산물이다.   

정범준씨에게만 시간이 하루 48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흔히 마음은 있는데 사는 게 바빠서라는 말을 하지만, 마음만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게는 약간 ‘맹구 기질’이 있다. 봉숭아학당의 맹구가 ‘저요, 저요’ 하고 손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손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일이라면 남들보다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싶다. 그걸 열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나 살사, 책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마음과 열정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한 해에 책 한 권씩 쓰는 직장인 저술가. 마라톤 뛰듯이 42권을 쓰겠다는 정범준씨. 대화하는 중에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책 주제들이 줄줄 이어졌다. TBC, 삼양라면, 영창피아노, 5·16 쿠데타 이후의 풍경 등등. 열정과 호기심은 그의 ‘페이스 메이커’였다.

ⓒ시사IN 윤무영신인철씨(위)는 토요일 오전에 미리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4시간씩 글을 쓴다. 신인철씨, 무엇을 썼나?〈토요일 4시간〉 〈레이체스터 이야기〉 〈럭셔리 마이 백〉 〈굿바이 핑계〉 〈직장생활에서 놓쳐서는 안 될 33가지 기회〉 〈마법의 지갑〉 〈팔로워십, 리더를 만드는 힘〉 〈핑계〉 〈영웅들의 전쟁〉 〈공대리 성공시대〉 〈황금안경〉 〈부자 신사와 달걀 하나〉
신인철씨 ‘자랑스러운 마마보이’ 자처

신인철 LG생명과학 홍보팀 과장(35)도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파’이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한 신씨도 배우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자랑스러운 마마보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교육열이 높았다. 국·영·수 학원을 뺑뺑이 돌리는 그런 교육열이 아니다. 부모는 무슨 일이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좋다고 여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술을 배웠다. 태권도 1단, 합기도 1단을 땄다. 검도도 배웠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익혔다. 독주가 가능할 정도로. 중학교 때는 전자 오르간을 독학으로 배웠다.

대학 시절에는 레크리에이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축제 사회자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레크리에이션 아르바이트와 멸치 상자 나르기 등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방학 때면 해외를 돌아다녔다. 30개국. 남들이 잘 모르는 곳,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이 즐거웠다.

고등학교 때 글쓰기대회에서 연거푸 상을 받을 정도로 글 솜씨가 있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이렇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군대 시절부터 그는 MBA 유학이 목표였다. 취미로 유화를 그리던 장교 시절, 틈틈이 어학을 공부했다. 2002년 초 취업을 하고서 ‘주경야독’했다. 퇴근하고 나서 일찍 잠자리에 들고, 밤 1시에 일어나 MBA 준비를 했다. 새벽까지 내처 토플 등 어학 공부를 하고, 곧장 강남에 있는 어학원으로 가서 첫 수업을 두 시간씩 들었다. 그리고 출근. 그렇게 1년6개월을 보냈다. 빡빡한 스케줄로 생활이 황폐해지더란다. 그래도 그에게는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르는 것은 묻는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른 이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MBA를 준비하면서 해외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어학이 모자라긴 하지만 네 열정이 놀랍다. 들어오면 칼리지에서 어학 코스를 빨리 끝내고 입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즈음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졌고, 유학을 포기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싶었지만 금세 툭툭 털고 일어섰다. 경영학을 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필립 코틀러·프리드만·크루그먼·루빈 교수 등 이메일 주소를 알 수 있는 해외 학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나를 소개한 다음 ‘당신의 어떤 책을 보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책을 추천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어떤 이는 책 목록을 보내오기도 했고, 어떤 이는 참고할 PDF 파일을 첨부해 보내왔다. 밤마다 해외 학자들로부터 추천받은 원서와 번역본을 읽으며 독학했다. 1년6개월 정도 공부를 했더니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자기가 공부한 것을 꼼꼼히 정리했고, 그 노트를 바탕으로 틈틈이 글을 썼다. 2004년 9월에 첫 책을 냈다. 지금까지 그는 경제경영 분야의 자기계발서 열두 권을 썼다. 세 권은 홍콩, 타이완에서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열심히 할 때의 희열, 마무리할 때의 쾌감 커

신인철씨는 사내에서 직장인 문화예술 모임인 ‘르네상스 워커스’를 제안해 활동하고 있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사무원이 일을 하면서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르네상스형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토요일마다 종로에 있는 전수소에 가서 가야금을 배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신씨가 최근에 낸 〈토요일 4시간〉은 서점에서 반응이 좋은 편이다. 틈새 시간과 토요일을 활용하자는 그의 소박한 제안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 그는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노트북으로 자료를 정리한다. 자료용으로, 집필용으로 노트북 3대와 데스크톱 1대를 사용한다. 토요일 아침 8시에는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평일 퇴근 이후에 공부하거나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토요일 오전에 4시간 동안 책을 쓴다. 낮 12시쯤 집에 들어가 아내와 청소를 하고 9개월 된 아이를 돌본다. 책이 한 권, 두 권 나오는 걸 보면서 신씨의 작업에 대한 가족의 이해도 깊어졌다. 어머니는 신인철씨가 새 책을 낼 때마다 즐거워한다. 전업주부인 아내도 토요일 오전 신씨의 외출을 양해한다.

직장 동료들도 그가 책을 쓰는 것에 신기해한다. 그가 빡빡한 회사 일을 하면서 책을 내는 것을 보며 간혹 ‘누군가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시간을 이렇게 촘촘하게 쓰는 것. 혹시 피곤하지 않을까. “느긋한 삶도 그 나름의 기쁨이 있겠지만 나는 좋아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글 쓰면서 하는 고민만큼이나 마무리했을 때의 쾌감이 크다.” 그리고 그가 덧붙이는 한마디. “벼슬을 안 한 사람들의 제문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적지 않나? 학생이라는 말을 붙인 데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평생 공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천생 ‘직장인 저술가’이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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