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상의 ‘괄호 속 현대사’ 김포공항 테러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정희상 기자 “김포공항 폭탄테러에 사용된 폭발물은 감식 결과 우리 군용 크레모아였다. 보안사는 ‘북괴 소행’이라는 감식 서류를 요구했다. 진실을 고수했다간 (나를) 간첩으로 조작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두려웠다. 그들의 요구대로 ‘북한제 화약’이라는 거짓 보고서를 써주고 수사에서 손을 뗐다.”1986년 9월14일에 터진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의 초동수사 당시 현장 감식을 지휘했던 심동수 박사(68·화공학)가 〈시사IN〉을 찾아와 35년 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치안본부(현 경찰청) 총포화약계 주임으로 당시 경찰 내 폭발물 희생자 유족이 내민 손 외면하는 국방부 정희상 기자 전남 함평군의 나산면·월야면·해보면 3개 면 주민들에게는 ‘5중대’라는 말이 오랜 세월 각인된 공포와 분노의 대명사다. 떼쓰며 우는 아이는 “5중대 온다”라는 말만으로 울음을 뚝 그쳤다. 어른들은 5중대 얘기만 나오면 “그 죽일 놈들”이라는 분노의 탄식을 절로 쏟아냈다.함평에서 ‘5중대’란 195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불갑산 지역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해보면 문장마을에 주둔했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준장) 20연대(박기병 대령) 2대대(유갑열 소령) 소속 5중대(권준옥 대위)를 일컫는다.이 5중대는 1950년 12월6일부터 1 5월 광주와 함께했던 대구·경북 학생운동 정희상 기자 지난 7월18일 광주광역시 운정동의 국립 5·18민주묘역에 대구에서 온 한 주검의 위패가 봉안됐다. 주인공은 경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80학번 권순형씨(2018년 3월 작고. 향년 58세). 이날 대구·경북에서 온 참석자들은 권순형씨의 유해가 뿌려진 경북 의성 지역의 흙을 담은 유골함과 권씨의 위패를 들고 있었다.권순형씨는 경북대 1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5·18 학살 만행을 실시간으로 대구 지역사회에 알린 혐의로 계엄군에 붙잡혔다. 그는 보안사와 경북경찰청 대공분실을 오가며 당한 고문 후유 70년 만에 건립된 ‘한강 인도교 희생자 위령비’ 정희상 기자 지난 6월28일 낮, 서울 한강대교 노들섬 남쪽 둔치에서 수십 년 묵은 한을 기리는 비석의 제막식이 열렸다. 1950년 6·25전쟁 개전 사흘 만에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희생자 800여 명의 고혼을 달래는 위령비였다.위령비 건립을 주관한 것은 서울시였다. 그러나 이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단체는 평화재향군인회(가칭, 상임공동대표 김기준)다. 평화재향군인회는 2005년 결성되었다. 헌법 전문의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항일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이바지하고 김원봉 혈육이 살아온 학살과 탄압의 70년 정희상 기자 서울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는 김용건씨(69)는 항일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의 친조카다. 아버지 김구봉은 약산의 11남매(9남2녀) 중 막내다. 하지만 김용건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동하던 1950년 7월 초순, 당시 22세로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버지 김구봉은 경남 밀양의 자택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한테 끌려갔다. 그는 세 형 김용봉, 김봉기, 김덕봉과 나란히 붙들렸다. 이렇게 체포된 약산의 네 동생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산골짜기에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6·25전쟁 발발 후 밀양 “일제 앞잡이가 영웅 되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정희상 기자 박경석 장군(88·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야전에서 두루 거친 노병이다. 한국전에서는 화랑무공훈장을, 베트남전에서는 최고 무공 수훈인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이른바 ‘육사 생도 2기’ 출신이다. 1950년 6월1일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가 20여 일 만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임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됐다. 박경석과 함께 포천 전투에 참가한 동기생 330명 중 86명이 초기에 전사했다. 17세의 초급장교였던 박경석도 전투 중에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 여순사건 피해자 눈물은 어느 대통령이 닦아줄까 정희상 기자 “장환봉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이었습니다.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고(故) 장환봉씨와 유족께 70여 년이 지나서야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잘못이었음을 선언하며 좀 더 일찍 명예롭게 해드리지 못한 데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지난 1월20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 법정. 김정아 부장판사가 한 사형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내란죄 무죄’를 선고한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논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옆자리의 배석판사 두 명이 일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를 떠올리는 이유 정희상 기자 코로나19 사태로 한국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주목받고 있다.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는 1968년 설립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부산 고신대학병원 장기려 박사(1911~1995)가 1968년 내건 표어다. 평양 김일성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였던 장기려는 한국전쟁 중에 내려왔다. 이때부터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 사업을 벌이는 데 몰두했다. 간장외과 분야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이면서도 급여를 환자 치료를 “막내는 빨갱이 새끼라고 총살놀이를 당했어” 정희상 기자 1975년 4월9일 아침, 이영교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남편 하재완의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한 지 19시간 만이었다. 그는 전날 오후 대법원 결정이 나오자마자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서울 시내 한 여관방에 머물며 구명운동 대책을 숙의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판결 직후 사건 관련자 8명을 신속히 사형 집행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인혁당 사건 사형수 8 최광준 교수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 정희상 기자 1973년 10월25일 중앙정보부(중정) 김치열 차장이 ‘유럽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 남산 청사에서 조사받던 중 간첩 혐의를 시인한 뒤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중정은 최 교수가 투신했다는 현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고문에 의한 타살 의혹이 일었다. 두 달 전인 그해 8월,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킨 중정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중정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최 교수는 그 무렵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에서 1년, 독일 훔볼트 재단에서 6개월 동안 교환교수를 끝내 친구를 배신해야 목숨을 부지했다 정희상 기자 1980년 양창욱씨(60)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신입생으로 ‘서울의 봄’을 맞았다. 그 시절 대부분 학생이 그랬듯 양씨도 운동권이 되었다. 1983년 3월7일 4학년이 된 양씨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해 신입생 환영 행사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4학년 김두황, 한선모도 같이 연행되었다.서울 성북경찰서 형사들은 세 사람을 경찰서 옆 여인숙으로 끌고 가 고문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구속과 강제징집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구속을 각오한 이들은 강제징집을 거부했다. 경찰은 학교에 연락했고 “유신의 심장 쏜 뜻을 왜곡하지 말라” 정희상 기자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26 사건 전 40일을 다뤘다.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중정) 부장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 김형욱 전 중정 부장 간의 권력 암투를 재구성했다. 영화는 얼마나 사실에 기반하고 있을까? 10·26 사건 평가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기자는 1990년대 초부터 ‘김재규와 10·26 사건’을 심층 취재해온 바 있다. 김형욱 제거 사건도 취재 목록에 있었다. 이 사건 취재기를 모아 지난해 〈팩트와 권력〉(2019)이라는 책을 썼다.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의 국선 변호 “5·18 행불자 가족 전원 DNA 채취할 기회 줘야” 정희상 기자 “누구든 5·18 행방불명자(행불자)와 아픔을 나눌 순 있어도 그 한을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에 사는 정호화씨(48)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80년 5월20일 오후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한다.그의 아버지 정기영씨(당시 43세)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에서 어머니와 ‘왕대포집’을 운영했다. 마침 그날 가게 음식 조리용 석유곤로에 기름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들 호화가 뒷자리에 태워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석유를 사온 뒤 태워주마” 하고 아들을 달랜 뒤 집주인 아저 군사반란 피해자는 아직도 고통받는다 정희상 기자 트라우마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광해 예비역 중령은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 진압 진영이던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속부관(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그날 밤 육군본부를 기습한 반란군(1공수여단)한테 총격을 받고 머리와 얼굴, 복부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씨는 현재 서울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 김광해 중령은 퇴근했다가 ‘총장 유고’ 소식을 듣고 육군본부(육본)로 달려갔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 평화통일 외치다 목숨 잃은 언론인 정희상 기자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조용준씨(85)는 1961년 12월22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형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아침에 형에게 면회 갔더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라. 이틀에 한 번꼴로 면회를 다녔는데 그 말이 형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 몰랐다.”면회를 마치고 나온 용준씨는 12월21일 오후 4시 라디오로 형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 당시 조용수의 나이 31세. 〈민족일보〉 창간을 문제 삼아 사형까지 시킨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튿날 전두환 반란군에 맞서다 스러져간 군인 김오랑 김해·정희상 기자 1979년 12월12일 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2층 집무실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휘하 부대에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12월13일 0시30분, 중무장한 군인 10여 명이 사령관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왔다. 맨 앞에 선 이는 12·12 쿠데타에 가담한 특전사 3여단(최세창 여단장) 휘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이들은 사령관실에 붙은 비서실로 밀고 들어갔다. 10여 분간 콩 볶는 듯한 M16 소총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12월12일 오후 6시30분 한남동에 있던 정 독재의 종언 예고한 ‘여공들의 투쟁’ 정희상 기자 “보고 싶은 엄마! (중략)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 많은 회장은 미국으로 도망가서 없고 사장들은 자기들만 잘살겠다며 지금 우리 근로자들을 버렸습니다. 회사 문을 닫겠다며 폐업 공고까지 내버렸답니다. 그러나 저희 근로자들은 비록 힘은 약하나 하나같이 똘똘 뭉쳐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략) 준곤이는 이 누나가 대학까지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 엄마가 대신 말 잘 해주세요. 이 누나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회사가 정상화되면 꼭 찾아뵐게요. (중략) 1979년 8월7일 서울에서 경숙 올림.”1979년 8월11일 새벽 2시께 유혈 참사 막은 ‘죄’로 고문받고 파면되고… 정희상 기자 이향진씨(62)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지역 치안 책임자였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의 둘째 딸이다. 그는 지금도 39년 전 아버지가 고문당하던 보안사 근처에 속옷을 전달하러 갔다가 받은 충격으로 불안증에 시달린다.전두환 신군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직후 1980년 6월 초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을 보안사로 연행했다. 90일간 감금하고 고문했다. 5·18 시위에 강경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신군부는 그를 파면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그에게 징역 1년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90일 동안 온 “박정희는 죽이고 박근혜는 은폐했다” 정희상 기자 1979년 10월18일 오후 6시께, 경남 마산시 봉암동에서 목수 일을 하던 유치준씨(당시 51세)는 평소처럼 퇴근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산호동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를 만났다. 시위대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유치준씨는 집으로 가는 길이 경찰에 막히자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류했다.이날 저녁 경찰은 강제진압에 나섰다. 분노한 시위대는 공화당 마산지구당사와 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마산경찰서장은 39사단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밤 11시 장갑차 4대가 74년 동안 가라앉은 수천 명의 죽음 정희상 기자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께,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 항구 300여m 지점에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수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틀 전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이 배는 해방 후 첫 귀국선이었다. 승선자 대부분은 오미나토 해군 시설부 군무원 또는 노무자 신분으로 비행장과 철도공사장, 하역 작업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육지가 보인다.” 경남 거창의 한 동네에서 나란히 일제에 징용당했다가 이 배를 탄 유경수씨(당시 28세)가 갑판에 먼저 나와서 아래 선실에 있던 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