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어떻게 하겠는데 기억은 안 잊히네요” 이명익 기자 황병주씨(65)는 베테랑 잠수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미 산업 잠수사 경력이 30년에 이르렀다. 2014년 4월20일 첫 잠수를 시작해 7월7일까지 세월호에 있었다. 이후 잠수병을 얻었는데, 해경을 상대로 낸 산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틀에 한 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4월20일 첫 잠수를 했는데 시야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손을 한 번 휘저었는데 한꺼번에 여러 아이들이 잡혔어요. 그 순간 감당을 못하겠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막 목놓아 울면서 누구한테인지 “그 친구들은 희망의 근거예요” 신선영 기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김은지 원장(47)은 세월호 참사 이후 2년 동안 단원고등학교에서 마음건강센터 스쿨닥터로 일했다. 이후 안산에 ‘마음토닥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개원해 10년 가까이 생존자와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있다.“재난 피해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어요. 6개월마다 한 번씩 생존자들을 만나죠. 다행히 국가 예산을 지원받아 10년 가까이 하고 있어요. 당시 생존 학생 75명 가운데 한 번에 40~50명씩 만나죠. 매번 만나는 친구들은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 연구와 별개로 따로 요청하면 만나기도 해요. 그들 “조금 더디더라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박미소 기자 김송이씨(35)는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누나다. 15년 차 타투이스트다. 참사 이후 유가족 여러 분에게 타투를 해준 적 있다. 어떤 어머니의 가슴팍에는 아이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새겨주고, 어떤 형의 팔에는 노란 리본과 가족의 생일을 남겨줬다. 어떤 마음으로 타투를 새기는 건지 그는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며 함께 슬퍼했다.“엄마도 저도, 병원을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서로 몰라요. 남들한테 건너 듣죠. 서로 걱정시키기 싫어서요. 지금까지 동생 이야기는 서로 잘 하지 않아요. 전 엄청 바쁘게 지내 “하고 싶은 거 꼭 하면서 살려고요” 박미소 기자 한혜진씨(26)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민지 학생과 생존자 장애진씨의 중학교 친구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후, 민지씨의 생일이 다가올 때면 애진씨와 함께 민지씨를 만나러 간다.“금요일을 좋아하고 퇴근을 좋아해요. 곧 퇴사하는데, 3·5·8월에 여행을 가요. 제 좌우명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살겠다’는 거예요. 민지 장례식 때, 민지 아버지께서 안아주시면서 ‘너희는 하고 싶은 거 꼭 하면서 자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고민하고, 정말로 그렇게 살아요.사실 가끔씩은 민지를 약간 원망했어요. “아직도 선원과 학생들 꿈을 꿔요” 이명익 기자 화물차 운전기사인 윤길옥씨(60)는 제주행 배에 오를 때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는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나마 배에서 잠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화물 기사의 삶은 육지로 오고 가는 삶을 뜻한다. 그는 10년 전 세월호에 올랐던 화물차 기사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하다.“아직도 왼쪽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아요. 두 발의 화상도 이식수술을 계속 해야 하는데 요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3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는데, 오래 하진 못했어요. 다른 일을 좀 하다가 2년 전에 다시 “사람들의 말로 상처 받았지만…” 조남진 기자 일반인 희생자 고 서규석씨의 아내 유성남씨(52)는 당시 중고교생 자녀 2남 1녀를 둔 가정주부였다. 세월호 참사로 남편을 잃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트라우마와 폐소공포증 때문에 아직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지 못한다.“남편은 제주도로 출장을 가던 길이었어요. 간판 사업을 했거든요. 비행기 타고 가라고 했더니, 같이 가는 사람이 트럭에 짐을 싣고 가야 한대요. 심심하니까 같이 가줘야 한다고…. 4월15일 저녁때 배에서 딸한테 전화했더라고요. 아빠 내일모레 올 테니까 엄마 말 잘 듣고 있으라고. 그게 마지막 통화였어요. 제가 평소 T “다른 사회를 바라는 의지 확인했다” 조남진 기자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였던 박진씨(53)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세월호 참사가 워낙 큰 재난이었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뭘 해야 할지 정리가 잘 안됐어요. 그래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어서 참사 피해자들의 인권에 대한 성명서를 인권단체들이 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가족들 만나는 것도 많이 힘들었어요. 아무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시던 때라서 그냥 곁에 있는 정도로만 활동했어요.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세월호 기억 세대를 위해서” 신선영 기자 장순복씨(50)는 준우 이야기를 하면 얼굴빛이 밝아진다. 준우와 함께한 시간은 10년이 지나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씨는 세월호 가족과 일반 시민이 함께하는 4·16합창단에서 2016년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다.“제가 집에서 노래하면 준우가 옆에서 잘 들어줬어요. 참사 이후에는 아이가 없는데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싫었어요. 한동안 엄청 울었죠. 4·16합창단에서 〈너〉 악보를 받았을 때 못 불렀어요. ‘태어나던 날 처음 잡던 손. 목소리를 알아듣던 너. 세 살 적 기차 창에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던 너. (중략) 열넷 “형제자매 52명의 목소리를 모았어요” 신선영 기자 최윤아씨(33)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공개 활동을 하던 희생자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큰 언니’ 노릇을 했다.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던 어린 형제자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 대신 목소리를 냈다. 세월호 관련 집회와 인터뷰, 간담회, 북콘서트, 도보 행진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가 체감한 10년은 국가의 대응이 아닌 피해자의 대응이 바뀐 시간이었다. ‘참사를 통해 어른들의 밑바닥을 봤다’라고 말하던 그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저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어요. 참사 이후에 바로 회사를 그만두진 않았어요. 퇴근하고 간담회에 “그저 그들 곁에 서 있을 뿐” 신선영 기자 ‘안산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께(이하 우리함께)’는 경기도 안산의 10개 복지관이 모여서 만든 비영리단체다.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복지사들은 세월호 참사 직후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피해자들을 상담했다. 당시에 주목받지 못하던 희생자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공간도 만들었다. 4년 가까이 ‘우리함께’를 이끈 박성현 전 사무국장(44)은 현재 4·16재단에서 피해자 지원과 안전 문화 사업을 담당하는 나눔사업1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세월호 참사 희생자 엄마가 제 직장 동료였어요. 아이가 탄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언니를 단원고등학 “학생에게 구명조끼 벗어준 내 딸에게” 신선영 기자 ‘기간제 교사’라는 꼬리표는 딸의 죽음 후에도 따라붙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학년 3반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씨(64)는 딸의 순직 인정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다. 각계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으로 ‘김초원·이지혜 교사 순직 인정 대책위원회’를 꾸려 오체투지와 서명운동, 기자회견 등 지난한 활동을 펼쳤다. 참사 발생 3년이 지난 2017년 5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지면서 두 교사의 순직이 인정됐다. 2018년 1월 김초원 교사는 단원고 교사 8명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에 안장됐다.“초원이는 중학교 2학년 “절망으로 시작했지만 희망을 봤어요” 신선영 기자 2014년 9월 정신과 의사 정혜신·심리기획자 이명수 부부의 제안으로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이웃)’이 문을 열었다. 20년 차 시민단체 활동가이던 이영하 전 대표(50)는 유가족이 마음껏 와서 울고, 편하게 밥을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저없이 실무를 맡았다. 2021년 2월, 6년 5개월여 만에 이웃은 문을 닫았다. 실무자에서 대표로, 이웃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그는 1년 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 〈밥은 먹었어요?〉를 펴냈다. 현재는 안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안산 지역 활동가로 굉장히 열심 “미지에게 뭐라고 얘기해줘야 할 텐데” 신선영 기자 유해종씨(62)는 2015년 안산 세월호 분향소 옆 공간에서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무를 깎고 다듬는 동안에는 괴로운 생각도 잠시 멈췄다. 분향소가 사라지고 2019년 5월에 자리를 옮기며 세월호 엄마·아빠가 주축이 된 ‘4·16희망목공협동조합’이 꾸려졌다. 그는 안산의 버려진 나무를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목공 체험 교육을 다닌다."우리는 정말로 미지가 집안의 자랑이라고 생각하며 키웠어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딸이라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죠. 2학년에는 1반 반장이 됐어요. 수학여행 가면 반장 대회가 있대요. 10개 반에서 “눈물 나오기 전에 얼른 노래를 불러요” 이명익 기자 가수 요조 씨(42)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기억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도 약해져간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노력한다. 고3이던 동생을 사고로 잃은 이후, 잊지 않기 위해 새기기 시작한 타투처럼, 자신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가진 세월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 ‘연대’라는 알람을 꺼놓지 않으려 한다.“세월호 가족분들의 초청을 받아 안산 행사에 갔어요. 제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다른 가족분이 오셔서 담당자분에게 ‘누구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요조라는 가수분이야.’ 그런데 그 질 “행복하게 ‘살자’고 생각하기까지” 박미소 기자 2학년 6반 권순범 학생의 누나 김소리씨(34)는 표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엄마들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괴로울 때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참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남 일 듣는 것처럼 모른 척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다.“4월이 되면, 집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요. 이맘때쯤이면 노란 현수막이 거리에 많이 걸리죠. 동시에 확성기를 단 차량이 안산 일대를 돌면서 혐오 발언을 크게 틀어놓고 다녀요. 매년 반복이에요. 종종 안산을 떠나고 싶어지죠. 차라리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편할 “단 한 명의 부모만 남더라도” 신선영 기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명임씨(60)는 인생에서 두 번 지옥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은 부모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사)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2학년 7반 반대표를 맡고 있다.“저는 세월호가 내가 살아서 겪는 두 번째 지옥 같아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살았어요. 열여섯 살이었는데, 당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나왔죠. 세월호를 겪으면서 진도 팽목항에서 ‘내가 다시 지옥 속에 들어와 있구나’ 싶더라고요. 근데 나는 아직도 살아 있구나. 왜 내 “세월호는 계속 새롭게 이야기되어야” 조남진 기자 역사소설가 김탁환 작가(55)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를 진행하다가 김관홍 잠수사를 만났다. 세월호 선체에서 희생자들을 찾아 품에 안고 물 밖으로 올라오는 김관홍 잠수사의 이야기로 장편소설 〈거짓말이다〉를 썼다. 퇴고 도중 김 잠수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또 다른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엮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랑이어라〉와 소설 〈거짓말이다〉의 제작 과정을 작가의 일기 형식으로 담아낸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를 출간했다. 2018년 메르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살아야겠다〉를 “우리 아들 유학갔다고 말해요” 조남진 기자 김광숙씨(70)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아들 김기웅씨(당시 28세)와 그해 10월 아들과 결혼을 약속한 예비 며느리 정현선씨(당시 28세), 그리고 조카 방현수씨(당시 21세)를 세월호 참사로 잃었다. 지금은 결혼한 딸네 집과 인천 집, 그리고 세월호 일반인추모관을 오가며 살고 있다.“이런 큰 사고가 남한테만 나는 줄 알았지 내 자식한테 올 줄은 몰랐어요. 세월이 흐르면 잊힌다고도 하던데…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자식 보고 사니까 그냥 잊어가면서 사는데, 자식이 그렇게 되니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겠습니다” 박미소 기자 304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시민과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모임이다. 2014년 9월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작했다. ‘낭독’회에서 참석자들은 참사와 관련된 글을 소리내어 읽고, 귀로 들으며, 세월호를 기억한다. 낭독‘회’는 한 장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집회처럼 이어져왔다. 저마다 조금씩 차이 나는 기억과 감정을 각자의 내면에 가둬두지 않고 타인들에게 풀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기억과 참사, 그리고 안전에 대한 의미를 매번 새로이 정립한다. 낭독회의 오랜 일꾼인 유현아(53)·권창섭( “정면 돌파하는 느낌으로 살아요” 이명익 기자 김예원씨(24)는 단원고에 자원 입학했다. 오빠(김동혁, 2학년 4반)가 받지 못한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었다. 참사 희생자의 동생이라는 걸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기에 오빠와 자신의 학생증을 함께 걸고 시작한 학교생활. 하지만 학교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신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상처받을 말과 글은 단원고 안에도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동생으로서 결심한 단원고 졸업. 스스로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저는 오빠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어서 단원고에 갔어요. 생각보다 학교생활은 힘들었어요. 그 일이 일어난 학교인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