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듯하게 현장에 도착한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시민과 악수하는 대신 진지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복장도 제대로 달려볼 태세였다. 3월1일 〈강원일보〉가 주최한 3·1절 기념 강릉 건강달리기 대회에 출전한 최 의원은 ‘본분’을 잊고 7km 코스를 완주했다. 선거에 나선 후보에게는 ‘피 같은’ 1시간 동안 최 의원이 말을 섞어본 시민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다음 날 3월2일. 춘천에 있는 한나라당 강원도당에서 엄기영 전 MBC 사장의 입당식과 강원도지사 출마 선언 기자회견이 있었다. 엄 전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잘사는 강원도를 만들겠다”라고 되풀이해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그는 언론사와 도청을 방문하고 인근 시장을 시작으로 민생 탐방에 나섰다.

ⓒ시사IN 조남진엄기영 전 MBC 사장은 3월2일 춘천의 한나라당 강원도당에서 강원지사 출마 선언을 했다.

4·27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 강원도. 여야의 유력 주자로 꼽히는 두 사람이 지난주 강원도에서 보여준 모습은 두 사람의 캐릭터만큼이나 정반대였다. 엄 전 사장은 도청과 도당이 있는 춘천에서 기자회견, 지역 발전 공약 제시, 언론사와 도청 방문, 시장 방문으로 이어지는 선거운동의 정석 코스를 밟았다. 반면 최 의원은 전략 지역인 강릉에서 일정을 시작해 7km 달리기 코스를 즉흥적으로 완주해버렸다. ‘앵커 출신 정통 엘리트’ 엄기영과 ‘길바닥 승부사 체질’ 최문순의 선거운동이 어떻게 전개될지 압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엄기영·최문순의 닮은 점, 다른 점

두 사람은 모두 강원도에서 태어나 춘천고를 다녔고(엄 전 사장이 5년 선배다), MBC에 기자로 입사해 사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닮은 점은 그게 다다. 엄 전 사장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MBC 내에서도 〈뉴스데스크〉 앵커와 보도본부장 등 화려한 자리를 두루 거친 정통 엘리트다. 최 의원은 기동취재반에서만 14년을 근무하고 MBC 노조위원장을 하다 해직된 후에는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을 지냈으며, 복직 후에는 부장대우 기자에서 곧바로 사장에 오르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18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도 미디어법 투쟁에 앞장서서 한동안 길바닥을 의원실 삼았다.

안 그래도 4·27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로 꼽히던 강원도지사 선거는 두 사람의 대결 구도가 잡히면서 전국이 주목하는 선거로 중량감이 더 올라갔다. 체급과 구도만 놓고 보면 ‘공중전’(중앙당 차원의 선거 지원) 선거가 예상되지만, 강원도 선거는 공중전만으로는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지역의 두 가지 특징이 선거의 문법을 독특한 방식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강원도는 행정 단위가 아닌 정치 권역 기준으로 보면 가장 인구가 적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때를 기준으로 유권자 수가 119만명에 불과하다. 유권자 390만명인 충청권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강원도 유권자가 보기에 영남은 한나라당을, 호남은 민주당을 갖고 있다. 충청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쥔다. 하지만 강원도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바닥 정서다. 강릉에서 만난 방 아무개씨(53)는 “강원도는 삼국시대부터 쭉 변방 아니었나. 낙후되는 것도 그래서지 뭐”라고 뿌리 깊은 소외감을 드러냈다.

이런 소외감은 정당 충성도를 느슨하게 만든다. 영동과 휴전선 접경지를 중심으로 한나라당 지지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우리 당’ 의식이 있는 영남권의 한나라당 지지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강원도 유권자는 근본적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를 ‘강원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지역 정당’으로 본다.

ⓒ시사IN 조남진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3월1일 강릉에서 열린 건강 달리기대회에서 7km를 완주했다.

대변해주는 정당이 없다는 소외감에, 중앙 정치권에서 발언할 수 있는 ‘큰 인물’에 대한 갈망도 커진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의 ‘이광재 열풍’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는 분석이 많다. 참여정부에서 권력 핵심에 있었고, 야권의 차기 주자 군에 들면서 지역구(강원 태백시 영월군·평창군·정선군)에서도 평판이 높은 이광재 전 지사가 위 조건을 두루 만족시키면서 폭발력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중앙 언론에서 지방선거 결과를 분석하며 거의 습관적으로 내놓던 ‘반MB 여론 폭발과 친노의 부활’이라는 설명은, 적어도 강원도와는 잘 맞지 않았다. 이광재 전 지사의 한 핵심 측근은 “우리는 선거하면서 ‘반MB’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다. 강원도는 그런 중앙 담론으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광재 개인 브랜드로 치러낸 선거나 다름없다. ‘우리 지역도 대권 주자 한번 만들어보자’는 바닥 정서가 만만찮게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이번 보궐선거도 어떤 인물이 ‘진짜 강원도의 큰 인물인가’를 겨루는 선거가 될 것이다. 정권 심판론은 잘해야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라고 내다봤다.

둘째, 강원도는 사실상 전혀 다른 선거 두 개를 동시에 치러야 하는 선거구다.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 일대, 강릉시를 중심으로 하는 영동지방은 ‘경상도의 연장’ ‘TK보다 더 TK스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수색이 강한 지역이다. 강릉에서 만난 한 민주당원은 “나는 안동 출신으로 강릉에 있는 대학에 왔는데, 우리 고향보다 더 보수적인 데가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반면 태백산맥 서쪽, 춘천시와 원주시가 양대 도시인 영서지방은 서울과 전철로 연결되는 등 수도권 정서가 상당하다. 두 지역에서 선거의 문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강원도의 중심을 자부해왔던 영동은 최근 들어 경제 활력과 인구 증가 면에서 모두 영서에 역전당했다. 다만 지역에서의 정치적 주도권만은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는 걸 위안 삼는 정서가 있었는데(민선 1~4기까지 도지사는 모두 영동 출신이었다),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 여야 후보가 모두 영서 출신(이광재·이계진 후보 모두 원주 출신이었다)이 나오면서 그나마도 무너졌다.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확정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모두 영동 출신 후보 찾기에 공을 들였다. 영동이 영서에 비해 유권자 수는 뒤지지만, 이런 복합적인 소외감이 두텁게 쌓여 있어 표의 응집력이 훨씬 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엄기영 대항마’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최문순 의원이 정작 민주당 내에서는 영서 출신(춘천)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3순위 카드’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얘기다. 민주당 지도부는 권오규 전 부총리(강릉), 김대유 전 청와대 경제수석(동해) 등 ‘영동 카드’를 먼저 고려했다. 이광재 전 지사의 선거 지원을 받아 영서를 양분하고 영동 표를 결집시킨다는 것이 기본 선거 전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거듭 출마를 고사하면서 당 지도부가 결국 ‘3순위’ 최 의원에게 급히 ‘SOS’를 친 것이다.


최문순, 영동 공략에 공들여

최문순 의원이 선거용으로 만든 프로필에는 ‘강릉 최씨’가 강조되어 있다. 강원도 일정 첫날인 3월1일과 2일 연속으로 강릉 최씨 종친회 일정을 잡았다. 최문순 카드에서 쉽게 떠올리게 되는 ‘정권 심판’ ‘언론 장악 대 언론 자유’라는 ‘공중전’ 구도만 갖고 가서는 강원도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모습이다. 예비 후보 사무실을 강릉에 내는 등 영동 공략에 공을 들이는 것도 민주당의 원래 선거 전략을 최대한 살려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최 의원은 “출마 선언 때 ‘지난 3년 이명박 정부의 독주에 대한 심판’이라고 선거 의미를 규정했다가, 정권 심판론 쪽으로 너무 세게 해서 좋을 것 없다는 말도 들었다”라고 고민을 내비쳤다. 지역 전문가들이 말하는 ‘강원도에 맞는 선거 전략’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정권 심판론이 젊은 층에 어떤 폭발력을 가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것 없이 승리가 가능할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방종현 한나라당 강원도당 사무처장은 “최문순 카드로 정권 심판론 선거를 저쪽이 해주면 우리는 가장 고맙다”라고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강원도에서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저쪽에서 영동 후보가 나오는 구도였다. 권오규 전 부총리가 후보로 나오고, 선거는 이광재가 뛰는 구도는 아주 껄끄러웠다. 두 번째로는 이광재 동정론이다. 정면으로 도정 중단 책임론을 제기하며 맞설 수도 있지만, 당에서는 동정론의 뿌리가 상당히 깊다고 보고 ‘이광재 함구령’이 내렸다. 세 번째, 정권 심판론은 우리가 가장 방어하기 쉽다. 강원도민은 ‘도 살림꾼 뽑는 선거에서 무슨 정권 심판이냐’라고 생각한다.”

엄기영, ‘모범생’답게 정공법 전략

그래서일까. 엄기영 전 사장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내놓은 출마선언문은 모범생다운 정공법을 택했다. ‘여당만이 할 수 있는 지역 발전론’ 논리가 그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원주·강릉 복선 전철 등 다섯 가지 지역 현안 해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다만 한나라당 내에서는 “최문순은 싸움꾼인데, 엄 전 사장이 싸움꾼 기질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러다 이달곤 꼴 나는 것 아니냐”(수도권 초선 의원)라는 불안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행안부 장관 출신의 이달곤 경남지사 후보는 현장 스킨십에 약하고 지나치게 ‘폼 나는’ 정책 선거만 하려 한다는 평을 듣더니 끝내 경남을 내주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엄 전 사장이 이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의미다.

두 사람이 본격 레이스에 돌입한 3월2일,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는 엄기영 대 최문순 가상 대결에서 42.2% 대 35.3%로 엄 전 사장이 6.9% 포인트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령별로는 30대와 40대에서 최 의원이, 나머지 연령층에서는 엄 전 사장이 앞섰다(상자기사 참조).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결국 투표율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안정적 투표 성향을 보이는 50대 이상과 달리 30·40대는 선거 구도가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투표 성향이 달라진다. 이들이 투표장에 쏟아져 나오면 의외의 구도가 나오면서 최 의원에게 유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인 강원도 선거 구도가 나오면서 엄 전 사장에게 유리한 판세가 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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