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러다 말겠지’ 하는 예상이 많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카드를 들고 나온 오세훈 서울시장이 정말로 ‘끝장’을 볼 기세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무상급식을 주민투표에 부친다는 발상이 무모해 보이지만, 막상 따져보면 의외로 찬반 양쪽 모두 셈법이 간단치 않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 165곳이 모여 만든 ‘복지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2월11일부터 주민투표 청구 서명에 들어갔다. 6개월 내에 서울시 유권자의 5%인 41만8000명이 서명하면 주민투표가 성사된다. 한나라당 서울시당 역시 주민투표 성사를 지원하기로 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오세훈 시장 ‘5세 훈이’ 별명 좋아한다”

주민투표법을 보면, 주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는 주체는 셋이다. 지자체장, 지방의회, 유권자의 5%가 넘는 주민 직접 발의가 그것이다. 이론상으로 오 시장이 직접 주민투표를 발의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주민 직접 발의라는 험난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자체장의 발의는 지방의회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민투표법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장악한 시의회가 발의를 의결해줄 리 없기 때문에, 오 시장은 주민 직접 발의로 우회해야 했다. 

ⓒ시사IN 백승기오세훈 시장(위)의 ‘3단계 안전망’ 때문인지 주민투표에 대한 한나라당의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오 시장 쪽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매주 한두 편씩 오 시장이 글을 올리는 블로그에는 ‘5세 훈이의 철없는 나라 걱정 미래 걱정’이라는 제목의 글이 두 편 올라와 있다. 오 시장을 고집 부리는 어린아이로 묘사하는 ‘5세 훈이’라는 별명을 두 번이나 제목에 가져다 썼다. 오 시장의 한 핵심 측근은 “시장이 그 별명을 은근히 좋아한다. 영악하지 않게, 이리저리 재지 않고 옳은 걸 옳다고 말하는 본인 모습에 어울린다고 느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측근들 사이에서는 오 시장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빗대는 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2004년 의원직 사퇴와 함께 ‘오세훈 선거법’을 만들어냈던 당시도 자주 거론된다. 핵심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길에 다 거는 게 오세훈 스타일’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번 주민투표 추진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보아달라는 얘기다.

“주민투표 카드에 정무 라인에서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 나도 안 된다고 했다. 당내 호응도 기대하기 어려웠고 중도 성향 지지층을 잃을 것도 걱정됐다. 하지만 오 시장이 이건 원칙의 문제라며 강행 돌파했고, 결국 여론과 당내 기류 모두 이제는 우호적으로 돌아섰다고 본다.” 오 시장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핵심 측근의 평가다.

초선급 소장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내 기류가 우호적으로 돌아선 것은 맞다. 한나라당 서울시당이 ‘10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한 것은 시큰둥한 반응 일색이던 초창기에 비하면 작지 않은 변화다. 하지만 오 시장의 뚝심에 감동을 받아서라기보다는,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가 확산된 덕이 더 크다. 한나라당과 오 시장 처지에서는, 이번 주민투표가 ‘3중 안전망’을 쳐놓고 시작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안전망은 문항 구성이다. 국민운동본부가 구성한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구안은 ‘점진 실시’와 ‘전면 실시’ 두 개를 보기로 제시하도록 구성됐다. 이 경우 ‘점진 실시’가 큰 폭으로 ‘전면 실시’를 따돌리는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반면 무상급식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묻게 되면 ‘찬성’ 의견이 훨씬 높게 나온다.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은 “지역구에서 여론조사를 해봤다. 무상급식 찬반으로 물으면 찬성이 더 많고, 전면 실시 대 점진 실시로 물으면 점진 실시가 좀 더 많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점진 실시·전면 실시’ 보기, 오 시장 유리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보기를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투표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의제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당사자 격인 서울시와 시의회 간 논의 없이 주민투표 청원을 추진하는 시민단체가 자의적으로 결정한 셈이다. 지자체가 주민투표 청원서를 접수하면 ‘주민투표청구심의회’를 구성해 관련 심의를 진행해야 한다. 여기에서 문항 논란이 다뤄질 수 있을까.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심의회가 두 번째 안전망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심의회는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당연직 의장으로 한다. 게다가 이번에 구성된 심의회 11명 명단을 두고는 “10대1이다. 민주당 시의원 한 명을 빼고는 ‘우리 편’이 아무도 없다”라는 목소리가 민주당에서 나온다. 김종욱 민주당 시의원은 “주민투표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 우리 당론이라, 심의회 구성과 관련해서는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사실상 저쪽 뜻대로 구성됐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뉴시스민주당 손학규 대표(오른쪽)가 2010년 11월16일 한 초등학교에서 배식을 하고 있다.
주민투표가 성사된다고 해도, 의결을 위해서는 투표수가 ‘유권자 수의 3분의 1’(약 280만명)을 넘겨야 한다. 서울과 같은 초거대 도시에서 선거철도 아닌데 투표율 33.3%를 넘기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오 시장 주위에서조차 “주민투표가 성사는 되어도 의결은 안 될 것 같다”라는 예측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무모한 도전 아닐까. 여기서 오 시장이 준비한 ‘세 번째 안전망’이 나온다.

이종현 서울시 대변인은 투표율 미달을 이렇게 해석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주민투표법에 보면 투표율 미달이 나오면 ‘찬성과 반대 양자를 모두 수용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즉, 미달일 경우 ‘점진 실시’와 ‘전면 실시’ 모두가 부결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전체의 11% 학생에게 급식비를 지원하는 현행 수준으로 정책이 유지된다.”

다시 말해, 전면 실시와 점진 실시를 두고 투표한 결과 정족수 미달이 나온다면 사실상 ‘무상급식 전면 반대’로 이해하겠다는 의미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만, 현행법에 보면 주민투표 투표율 미달을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행법이 사실상 찬반 양자택일을 가정하고 있어서 이번 같은 양자택일이 아닐 때 정족수 미달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할지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꼼수다”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2005년 충북 청주시·청원군 통합 주민투표와,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부지 결정 주민투표는 모두 양자택일의 문제였고, 제주도 행정구역 개편안 주민투표는 ‘혁신안’과 ‘점진안’이 맞붙었지만 유효 투표수를 넘겨 전례가 되지 못한다.

민변 사무처장인 류제성 변호사는 “제안에 제시된 보기 두 개가 부결된 것이 아니라, 주민투표 제안 자체가 부결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보면 시의회가 의결한 전면 무상급식을 그대로 시행하면 된다. 하지만 서울시가 자기 뜻대로 해석하겠다면 주민투표 결과 해석을 둘러싼 또 다른 법정 공방이 불가피하다. 그렇게 시간 끌기를 노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3중 안전망’을 쳐둔 서울시의 논리를 인정한다면, 주민투표 성사 기준선인 42만명 서명을 받는 일이 사실상 유일한 난관인 셈이다. 이 역시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투표를 성사시키고, 불리한 여론을 반전시키고, 기준 투표율까지 충족시켜야 한다’는 3중 과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보기 문항 조정과 투표 결과에 대한 유권해석을 무기로 문제를 훨씬 단순하게 만든 셈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오 시장을 자기 손으로 직접 응징하기 위해 주민투표에 찬성하는 시민은 저쪽 전략에 말리는 셈이다. 투표를 성사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간명한 응징책이다”라고 말했다.

ⓒ뉴시스복지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2월11일 ‘전면 무상급식 반대 및 단계적 무상급식 실시’를 위한 주민투표 청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일단 민주당의 공식 방침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다. 김종욱 민주당 시의원은 “재판이 진행 중인 건이나, 예산과 관련된 건은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라고 법에 정해져 있다. 무상급식은 둘 모두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울시가 국민운동본부의 주민투표 청원을 받아들인 것은 불법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맞불 주민투표’ 실시할 수도

하지만 민주당은 일단 주민투표 청원을 지켜보는 단계다. 김 의원은 “법원에 주민투표 취소 가처분 신청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 혹시 법원이 기각이라도 하면 오히려 주민투표에 불이 붙을 가능성이 있어서 보류 중이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42만명의 서명을 받는 것이 쉽지 않은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겠다는 속내다. 실제로 야권은 서울광장 개방 관련 조례 개정 청구운동에서 6개월 동안 서명 11만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6개월간 42만명’이 얼마나 힘겨운 수치인지 아는 것이다. 더욱이 주민번호 오기 등 각종 무효 서명을 감안하면 최소한 5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이종현 서울시 대변인은 “지난번 서울광장 조례 서명에서 무효율이 17.7%였다”라고 밝혔다.

공식 방침이 ‘주민투표는 불법’이라는 것이니만큼, 투표 성사 이후의 대응책은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민주당 태도이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면 실시·점진 실시로 나뉜 보기 구성과 “투표율 미달 시 점진 실시와 전면 실시 모두 부결된 걸로 본다”라는 서울시 방침에 대해서는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민주당 서울시당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주민투표는 의회가 발의하면 곧바로 실시할 수 있다. 주민 청원 숫자가 성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민주당은 무상급식 찬성과 반대를 묻는 ‘맞불 주민투표’를 의회 의결로 청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양쪽 모두 진흙탕 싸움이 되지만, 오 시장이 원하는 ‘점진·전면 구도는 깰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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