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보·보수 양쪽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와 2월10일 국제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진보와 보수 측 지식인들이 한꺼번에 공략하는, 흔치 않은 경우의 장본인이 되었다. 예전부터 진보·보수 간의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해왔는데, 드디어 양쪽 지식인들이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 이것이 대타협의 기초가 된다면 기꺼이 욕을 먹겠다(웃음). 여기까지는 농담이고, 결국 내 이야기가 그분들의 입맛에 100%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불거진 것 아닐까. 예컨대 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다고 말하는 편인데, 이게 잘 통하지 않더라. 나는 진보와 보수의 이런 고정관념부터 부수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중앙은행 독립’의 경우, 한국에서는 진보적 의제지만, 유럽에서는 보수의 정책이다. ‘산업정책’도 한국에서는 우파(박정희 전 대통령)가 주로 추진했지만, 유럽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많다. 이런 고정관념이야말로 군부독재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다. 난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보수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맞는 이야기만 할 거다.

한경연(한국경제연구원) 리포트는 시장주의 교리에 입각해서 장 교수를 비판하고 있다. (농담 섞어 말하자면) 시장지상주의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시장에서 성공했다면, 적어도 시장주의 시각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인정해줘야 한다(웃음). 나처럼 ‘시장도 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시장에서 많이 팔렸다고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시장주의자를 자처하는 분들이 그렇게 말하면 이율배반이다.

ⓒ시사IN 백승기장하준 교수는 ‘재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국인들의 삶이 좌우된다’고 판단한다.

진보 측에서는 장 교수가 주장한 ‘사회-재벌 타협론’을 공격한다.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대신 ‘노동권 보호’ ‘부유층 증세’ 등을 얻어내자는 주장이었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낸 2003~2004년은 재벌들이 굉장한 위기위식을 느끼고 있을 때다. (‘기업은 소유주인 주주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하고, 이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1990년대 초·중반에 도입한 것은 사실 재벌이었다. 속내는 정부 간섭 받기 싫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 논리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엔 부메랑으로 재벌 가문에게 돌아온다. (한국 기업의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게 된) 해외 금융자본들이 재벌의 경영권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진보 쪽에서도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수용해서 ‘재벌 가문이 산하 기업들의 주인이냐’며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했고, 상당한 사회적 호응을 얻었다. 재벌이 궁지에 몰린 때였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주는 대신 얻어낼 것을 얻어내자고 한 거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사회-재벌 타협론’은 권력자와 재벌이 밀실에서 만나 거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민에게 가장 좋은 ‘재벌 문제 해결책’은, 재벌 산하 기업들을 (론스타 같은) 해외 금융자본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재벌의 좋은 점은 살리고 문제점은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당시 해외 금융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던 재벌들이 이제는 스스로 금융자본이 되어 편히 먹고살자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당시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재벌을 압박했지만, 지금 정부는 오히려 재벌을 편드는 사람들 아닌가. 재벌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시국이라 타협에 나서지도 않을 거다. 물론 이후 경영권 문제를 지렛대로 재벌을 압박해서 대타협을 이뤄내는 전략이 유용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사회-재벌 타협론’의 개연성은 당시(2000년대 초·중반)보다 많이 희박해졌다.

‘복지국가’를 강조한 〈…23가지〉가 엄청나게 팔리자 보수는 당황하고, 진보 일각에서는 ‘경제성장만 강조하던 장하준이 복지를 이야기한다’고 흐뭇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장 교수가 ‘복지’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에 이 이야기 할 때는 많은 사람이 ‘웃긴다’고 했다. 한국은 복지를 실시할 여건(경제 여건,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 등)이 전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심지어 한나라당도 복지는 당연한데 ‘몇% 복지’냐 운운하고 있지 않나. 내 전공이 무역·산업 정책이라서 그동안 복지 이야기를 내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주제로 쓴 논문도 여럿 있다. 박사 과정 때부터 스웨덴이나 렌-마이드너 모델(스웨덴 복지의 기틀이 되었던 사회적 대타협 모델) 등을 공부했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채택하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고 했다. 이에 대한 반박이 진보 쪽에서도 나온다.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의 통계에서 숫자로 다 나오는 거다. 주주자본주의와 부자 감세는 일종의 정책 패키지로 시행된다. 그 결과는 투자와 성장이 모두 저하되는 거다.

그 증거로 1980년 이후의 성장률이 이전의 성장률보다 훨씬 낮다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일반적으로 1980년 전후를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 시행되는 전환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대처,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최고지도자로 선출된다. 세네갈(1979년)과 멕시코(1982년)에서는 처음으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

그런데 김기원 방통대 교수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이 적용된 시기인 1995~2009년에도 성장률이 2.3%(이 지역으로서는 고성장)에 이르렀다고 반박한 바 있다. 그것은 2000년대 전후 중국의 급성장에 따라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 가격이 많이 오른 덕이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석유가 나오기 시작한 나라도 있다. 2000년대 아프리카에서 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앙골라·적도기니·에티오피아·차드인데 이 중 에티오피아를 빼고는 모두 새롭게 산유국이 된 나라들이다. 이런 고성장기를 포함해도 사하라 이남 지역의 성장률은 1980년 이후 0.2%에 불과하다. 이전에는 그럭저럭 성장하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된 지난 3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다.

장 교수가 민족주의자라서 재벌을 옹호한다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유사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혐의를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재벌을 옹호했다고? 어폐가 있다. 다만 재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국인들의 삶이 상당히 좌우된다고 보는 것은 맞다. 또 ‘해외 금융자본’에 비판적인 것은 그들이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금융자본이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은 그 돈이 어떤 돈이고, 주인이 누구인지 실체 파악이 힘들다. 재벌을 공격한 결과가 이런 금융자본에 한국의 주요 기업을 넘기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민족주의자? 나는 민족이 영원히 불변하는 실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하며 또 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이란 집단이 일단 형성되어 있다면 중요한 것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핵심적 축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안녕을 걱정하는데, 이런 걱정이 민족주의라면, 나더러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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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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