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변론의 큰 어른 이돈명 변호사가 1월11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판사를 거쳐 1963년부터 변호사를 시작한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론의 길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 변호사는 52세였다. 은퇴 준비를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1975년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던 김지하 시인을 변호한 것이 ‘첫 인권 변론’이었다. 이 변호사는 생전에 이를 두고 “영예를 누리게 됐다”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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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사건이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던 군사독재 시절, 그가 맡은 사건은 거의 유죄 판결이 났다. 고 리영희 선생 등 지인들은 농담 삼아 그를 ‘유죄 변호사’라고 불렀다. 동일방직 사건, YH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등 대표적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유죄 변호사’를 찾았다.

1985년에는 한승헌·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 동료·후배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정법회’를 만들었다. 최초의 인권변호사 모임인 정법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모태가 된다. 이 변호사는 생전에 “여든이 넘어 돌아보니, 1974년부터 1987년 6월항쟁 때까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이 인상에 남고, 보람을 느끼고, 자랑스럽고, 바른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회고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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