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을 중심에 두고 지난 1년을 뒤돌아보니 그야말로 ‘폭풍 속으로’였다. 아마도 전자책 에이전시를 경영하면서 너무나도 다양한 입장들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20여 년간 출판사를 경영해오면서 출판업계를 뒤흔든 수많은 이슈를 지나왔지만, 전자책 이슈는 그야말로 당황스러웠다. 다만 수단이 바뀌었을 뿐 ‘콘텐츠 산업’이 그 본령일 수밖에 없는 ‘디지털 콘텐츠(전자책)’를 전자업계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일각의 논리를 접하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종이책(아날로그)은 출판사에서 만들고, 전자책(디지털)은 전자업계(유통사·제작사)가 만드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했다. 그 결과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열악한 지금의 전자책 시장이다.

사실 시장 진입 단계에서 전자책 제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콘텐츠 생산자인 출판사가 아니었다. PDF, e-Pub 전자책을 추가적인 편집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변환 차원으로 여긴 전자책 유통사나 우후죽순 생겨난 전자책 제작 업체, 단말기 회사 등에서 전자책 수량 늘리기에 적극 나섰고, 현재 시장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전자책은 그렇게 제작된 결과물이다(보유한 전자책의 수량을 강조하는 경향은 이때 시작되었다).

ⓒ뉴시스한국의 전자책 시장(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아직도 열악한 상황이다.
그러다 몇몇 출판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자책의 저작권 문제와 품질 문제, 판매·정산·관리 등의 DRM(Digital Rights Management) 문제가 엉망진창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자책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유통사의 폐쇄성 탓에 본인이 구입한 단말기로는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편집·감수 과정이 전무해 서체가 깨져 있고, 그림과 본문이 따로 놀기도 했으며, 포맷이나 솔루션·DRM이 각양각색이라 어떤 단말기를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그런 배경 아래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일부 출판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판사들은 작가와의 전송권(저작물의 소유권자 또는 사용권자가 저작물 전송에 관해 갖는 권리) 문제를 해결하고 표준화된 포맷으로 양질의 전자책을 직접 제작해서 투명하게 유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콘텐츠 생산자’로서 본연의 구실을 다시금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규모가 있는 출판사들은 전자책 부서를 신설했고, 중소 규모의 출판사들은 함께 연합해 2009년 중반 (주)한국출판콘텐츠(이하 e-KPC)라는 전자책 제작·유통 대행 에이전시를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e-KPC의 목적은 하나다. 전자책 논의에서 유독 소외되어온 독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제대로 된 하이 퀄리티’ 콘텐츠를 생산하여 ‘착하게’ 유통시키자는 것!

‘좋은 콘텐츠’와 ‘착한 플랫폼’ 구축이 과제

작가·출판사·플랫폼 기업·독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전자책 생태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유념할 과제는, 언급했듯이 ‘좋은 콘텐츠’와 ‘착한 플랫폼’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겠지만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구글의 기업 모토 ‘Don’t be evil’(악해지지 말자)에서 가져왔다(아이러니하게도 구글은 현재 전혀 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콘텐츠의 구입-다운로드-열람-관리 등 전자책 소비 전반에 걸쳐 독자 편의적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은 전자책 생태계를 구성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전자책은 ‘플랫폼’ 전쟁인 것이다(애플이 ‘아이팟’과 ‘아이튠즈’를 통해 음원 플랫폼을 장악한 결과를 떠올려보자). 전자책 시장 초기 단계에서 제작사나 유통사가 콘텐츠에 욕심을 낸 이유도 바로 플랫폼을 장악하기 위해서였고 단말기 회사들이 콘텐츠 비즈니스에 뛰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e-KPC를 경영하며 만난 다양한 입장 중에서 가장 타협이 힘들었던 것이 플랫폼 기업을 자처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함께 폭풍을 겪었기 때문일까. 플랫폼 기업이 착해져야 전자책 생태계가 바로잡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들도 이제 조금은 욕심을 내려놓은 듯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인한 본격 멀티미디어 시대에 콘텐츠를 발굴·기획·창작·편집·생산하는 주체가 출판사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결과일까.

어쨌든 종이로 만나던 책, PDF와 e-Pub으로 만나던 책에서 나아가 오감과 인터랙션으로 펼쳐지는 멀티미디어 책은 모든 매체를 융합하여 책이라는 미디어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멀티미디어 책들의 진화된 기능이 ‘인터넷 미로’에서 헤매던 인류를 ‘진짜 지식과 정보의 세계’(해당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의 하이퍼링크)로 이끌 것이라는 어느 누리꾼의 말은 과언이 아니다. 웹2.0이 인류에게 ‘개방·참여·공유’를 선물했다면 멀티미디어 책은 인류에게 ‘지식과 정보의 효율적 접근과 효과적 습득’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렇다면 책이 더 이상 예전의 책이 아니면서, 책은 반드시 기존 책의 구실을 이어가야 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지금의 움직임이 전자책의 미래를 결정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전자책 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본연의 구실에 충실할 때다. 작가와 출판사는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제작사는 양질의 전자책을 만들고, 유통사와 대기업 등 플랫폼 기업들은 공공적으로(표준화가 관건이다) 독자 편의 환경을 제공하며, 독자들은 자신의 환경과 필요에 맞춰 전자책을 사보면(불법 다운로드는 삼가주시길~) 되는 시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한민국이 전자책 강국으로 세계적 위상을 드높일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기자명 신경렬 (더난출판 대표·(주)한국출판콘텐츠 대표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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