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삼성 백혈병 피해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 두 번째 공판은 무산되었다. 이 소송은 삼성전자가 ‘피고’인 근로복지공단과 함께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참가하면서 유족과 삼성 간의 법정 싸움으로 바뀌었다.
이날 원고 쪽 증인으로 ㅅ씨와 ㄱ씨 두 명이 나와 증언할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삼성전자에 다니다 퇴직한 이들로 희귀암에 걸려 고통받는 동료들을 보면서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ㄱ씨는 원고 가운데 한 명인 송창호씨 후배이다. 현재 송씨는 삼성 반도체 온양공장에 다니다 비호치킨 림프종에 걸려 투병 중이다. 원고 쪽 변호인단은 ㅅ씨에게 기흥공장 상황을, ㄱ씨에게는 온양 공장 상황을 들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11월25일 1차 공판이 끝난 뒤 이상기류가 감지되었다. 지난 12월 중순 밤 12시께 송창호씨는 ㄱ씨한테 전화를 받았다. 송씨는 “후배가 술을 한잔 먹은 것 같더라. ‘미안하다. 죄송하다. (법정에) 못 설 것 같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현재 ㄱ씨는 보험 관련 일에 종사하는데 그의 고객 상당수가 삼성전자 직원이다. 나머지 증인 ㅅ씨도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 지킴이)에 괴로움을 호소했다. 반올림 쪽에서는 증인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이 증언을 철회하는 사이 또 다른 이상기류도 감지되었다. 삼성 백혈병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삼성 쪽이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삼성은 황씨를 ‘확신범’으로 여겨 2008년 이후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2년 만인 12월15일 삼성전자 기흥공장 인사과 간부가 황씨의 강원도 속초 집으로 찾아왔다. 황씨는 “예전에는 합의하자고 했는데 이번에는 ‘삼성에 도움을 요청하세요’라고 하더라. 굶어죽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삼성 쪽은 12월28일에도 황씨를 찾아왔다.
삼성 측 재조사 결과 재판에 영향 줄 듯
재판부는 2월28일 법원 인사를 이유로 다음 공판을 3월14일로 잡았다. 재판부는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은 사안인 만큼 새 재판부가 증인심문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밝혔다.
공유정옥 산업보건전문의는 “시간은 삼성 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판이 늦춰질수록 삼성에게는 새로운 증거를 제출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삼성이 밝힌 재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삼성은 지난해 7월 보건 컨설팅 회사인 인바이론사 주도로 하버드·존스홉킨스 대학 보건대학원과 국내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진 등 20명이 참여해 재조사팀을 구성했다. 삼성 쪽 관계자는 “(재조사에) 1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는데 재촉하고 있다. 1월이나 2월 사이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재조사 결과는 재판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원고 쪽 박영만 변호사도 “변론 종결 전에 재조사 결과가 나오면 삼성 쪽은 재판부에 이를 증거로 제출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반면 증인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던 유족 측은 새로운 증거를 제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앞서 지난해 11월10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750만 달러를 들여 밴더빌트 대학에 의뢰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종사자 10만명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백혈병 등 희귀암 사망률은 반도체 공정의 작업환경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이다. 삼성 변호인단은 이 조사 결과를 1차 공판 때 소개하기도 했다.
12월27일 피해자 가족들이 조촐하게 송년 모임을 가졌다. 황상기씨는 맞춤법은 틀리지만 간절한 소망을 담아 연하장에 이렇게 꾹꾹 눌러썼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삼성 백혈병 문제가 산재 인정을 못 받는다면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겠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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