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수요즘 로스앤젤레스 도심과 인근 지역에서는 명품 로고가 크게 보이는 옷을 입은 남녀가 명품관을 순회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이 지역 명품 상가의 큰손 노릇을 하고 있다.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는 틈을 타 미국에서 유명 브랜드 상품을 사기 위한 이른바 ‘해외 원정 명품 쇼핑’이 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명품 과소비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이웃한 오렌지카운티에는 코스타메사라는 소도시가 있다. 백인 중심 지역인 이곳은 불법체류자 단속이 심해서 한국계를 비롯한 소수계 주민들에게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요즘 이 도시는 ‘사우스코스트 플라자’라는 초대형 쇼핑센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명품 전문 쇼핑몰인데, 한국의 대형 백화점 10개를 합친 것보다 큰 공간에 세계 각국에서 온 각종 명품 브랜드 매장이 가득하다.

‘명품의 거리’로 유명했던 베벌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를 제치고, 이곳은 2~3년 전부터 미국 서부 지역의 신흥 명품 쇼핑 중심지로 자리 매김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 등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의 돈과 사람이 몰리는 장소다.

요즘 이곳에 한국인들이 북적거린다. 명품 브랜드들이 ‘노 세일’ 원칙을 내세워 좀처럼 하지않던 바겐세일을 얼마 전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탄절 직전부터 새해 초까지는 미국 소매업계가 가장 큰 폭으로 세일을 하는데, 그런 흐름에 별로 휩쓸리지 않았던 곳이 사우스코스트 플라자의 명품 브랜드 매장이었다. 그러나 2007년 12월에 샤넬이나 구찌, 살바토레 페라가모, 루이비통, 에르메스를 비롯한 이곳의 다양한 유럽 명품 브랜드들이 연중 가장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현지 한인과 한국인 방문객이 특정 브랜드 하루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등 싹쓸이 쇼핑을 하고 있다. 한국인이 특히 선호하는 샤넬의 경우, 영업장을 가득 메운 고객들끼리 매장 직원을 제쳐둔 채 한국어로 제품을 추천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원래 연말연시는 쇼핑객이 증가하는 철이지만 올해 한국인들의 명품 구매는 거의 주목할 만한 수준이라는 게 쇼핑센터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곳 페라가모 매장 측은 “(세일 실시 후) 아시아계 쇼핑객들이 전체 고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라고 밝혔다. 세일 첫날이었던 2007년 12월14일 페라가모 영업장을 드나든 아시아계 고객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이날 한국인 고객이 쓴 돈은 매장 전체 매출의 50%를 넘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인근 신도시인 어바인은 물론, 로스앤젤레스와 풀러턴 등 각지에서 현지 한인이 몰려들었다. 한인들은 쇼핑센터 내에서도 최고급 명품 브랜드 전용관으로 형성된 C·D 구역 일대를 몰려다니면서 쇼핑에 열을 올렸다.

매장 명품 쓸어 담듯이 구매하기도

쇼핑객 중에는 겨울 휴가철을 맞아 한국에서 온 여행자도 상당수다. 세일 첫날 단체 여행객을 이끌고 사우스코스트 플라자를 방문한 한국의 ㅇ여행사 가이드 전여희씨(가명·33)는 “한국 관광객들이 샤넬 매장 물건을 쓸어 담다시피 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환율 하락에 명품 세일이 맞물려 한국 ‘명품족’들의 미국 원정 쇼핑이 도를 넘어섰다”라고 말했다.

9박10일 일정으로 미국 서부 일주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전씨는 “최근 사우스코스트 플라자가 여행 일정에 추가됐다”라고 밝혔다. 당초 로스앤젤레스에서 조금 떨어진 온천 휴양지인 팜스프링스 근처 프리미엄 아웃렛(상설 할인매장)으로 잡혔던 관광 코스가 바뀐 것이라는 설명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이월 상품을 몰아서 판매하는 팜스프링스 인근의 아웃렛은 미국 서부 지역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였다. 로스앤젤레스 도심과 가까운 곳에서 재고가 아닌 신제품을 할인 판매한다는 뉴스를 귀신같이 알아챈 여행객들의 성화로 인해 여행 상품 구성을 변경한 것이다.

ⓒ오종수
전여희씨는 “여기서 최고 수준의 명품 브랜드들이 세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고 온 여행객이 스케줄 변경을 줄지어 요구했다. 팜스프링스 쪽은 멀기 때문에 당분간 제외됐다”라고 말했다. 여행객 가운데 20~30대 젊은 층은 돌체 앤 가바나, 혹은 파텍 필립처럼 아직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 매장만을 돌아다니면서 ‘표적 쇼핑’을 하기도 한다. 명품 로고가 크게 보이는 옷을 입은 한국인 남녀 커플이 손을 잡고 명품관을 순회하는 장면은 요즘 이곳에서 흔하다.

한국인 명품족들은 이곳뿐 아니라 전통 명품가인 로데오 드라이브와 로스앤젤레스 일대 고급 백화점을 휘저으면서 이 지역 명품 상가의 큰손 노릇을 맡고 있다.

쇼핑과 친지 방문 목적을 겸해서 로스앤젤레스에 들렀다는 여행객 윤지혜씨(26·가명)는  “한국보다 훨씬 싼 가격에 갖고 싶었던 물건도 사고 관광도 할 수 있어서,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겨울 휴가를 이용한 미국 쇼핑 여행이 화젯거리다”라고 말했다. 로데오 드라이브에 있는 명품 귀금속 브랜드 까르띠에 영업 관계자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오는 외국인 관광객이 올해 하반기 이후 2배로 늘었다. 달러 가치 하락에 따른 영향이 큰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로데오 드라이브의 각 명품 매장 종업원에게 1000달러(약 93만원)짜리 여행자 수표를 뭉치로 내놓고 물건을 사들이는 한국인 손님의 모습은 익숙하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따위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종업원도 있다. 마치 태국 재래시장 풍경을 보는 듯하다.

이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사우스코스트 플라자에서 일하는 50대의 한 경비직원은 “미국 내 한인들의 경제력이 급성장하고, 한국이 경제대국이 된 것도 잘 알겠는데, 떼 지어 고급 브랜드 매장만 몰려다니면서 쇼핑백을 둘러매고 다니는 모습은 미국 내 다른 그룹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정작 한국 내에서는 양극화의 그늘에서 생활고에 찌든 사람이 널려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넘치는 달러를 주체하지 못해 미국 원정 과소비를 일삼는 모습이 오늘날 한국 경제의 자화상이다. 

기자명 로스앤젤레스=오종수 (현지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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