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에서 G20 서울 정상회의를 다룬 가장 인상적인 뉴스 중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빗댄 조크로 좌중을 웃겨 글로벌 유머 감각을 과시했다는 ‘쾌거’였다. 그러나 조금 더 다가가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다섯 차례 이어진 G20 회의 가운데 이번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던 적은 없었다.

세계 경제위기 직후인 2008년 11월에 열린 제1차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은 금리 인하, 유동성 공급 확대 등에 거의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의 회의에서도 큰 갈등은 드러나지 않았다. 경제위기가 환율·무역 전쟁으로 번지다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고 만 1930년대에 비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한 변화였다. 인류와 자본주의는 세계적 차원의 경제 조절이 가능한 단계까지 진화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위기 진화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자 세계 각국은 처절한 ‘자국 이익 챙기기’에 들어갔다. 이런 국가 간 갈등은 서울 정상회의에서 조용하지만 살벌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미국이 먼저 도발했다.

미국, 한 입으로 두말하다

미국은 지난여름 이른바 ‘양적 완화(quanti– tative easing)’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예고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위안화 절상을 강도 높게 압박했다. 이는 전 세계, 특히 수출 흑자국들에 타전하는 미국의 ‘복합적’ 신호였다. 다른 나라들이 ‘알아서’ 통화를 절상하지 않으면 달러화를 인위적으로 절하해서라도, 미국의 목표(달러화 절하로 수출 실적 향상)를 달성하겠다는 것. 이런 분위기에서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진행된 경주 G20 재무장관 회의(10월22일)에서는 상당히 ‘괴이한’ 방안들(이른바 ‘시장환율 결정제’와 ‘경상수지 목표제’)이 제출되었고, 언론은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10여 일 뒤인 11월3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는 6000억 달러 규모의 ‘양적 완화’를 발표했는데 이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한 격이었다.
 

ⓒ청와대 제공G20 서울 정상회의는 세계 자본주의가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11월12일, G20 정상들이 코엑스 회의장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실 양적 완화는 ‘시장결정 환율제’ 같은 방안을 제출한 나라가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인위적 시장 조작’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는 문자 그대로 경기부양을 위해서 통화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다만 양적 완화는 금리를 내리거나, 민간이 보유한 증권을 사들이거나, 상업은행의 중앙은행 예치금을 줄이는 식의 통상적인 거시경제 정책이 아니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별명 ‘헬리콥터 벤’이 암시하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 지폐를 인쇄해서 시중에 뿌리는 극약 처방이다.

이는 수출 흑자국 정부들을 발끈하게 하는 조치였다. 늘어난 달러화는 사실상 금리 수준이 0%인 미국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수출 흑자국(미국보다 고금리)으로 쳐들어가 이 나라들의 통화가치를 절상시킬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해당 국가의 수출 실적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들어온 돈은 갑자기 나가면서 그 나라 경제를 심각하게 혼란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은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인 달러화 절하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를 일주일 정도 앞둔 상태에서 살벌한 설전이 벌어진다. 독일의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11월5일 〈슈피겔〉 인터뷰에서 “돈을 찍어내서 인위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낮추려고 하다니, 이런 미국이 어떻게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비난한단 말인가”라며 흥분했다. 메르켈 총리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채무와 금융 거품으로 성장하는 나라”라고 비난했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심지어 “달러 약세로 엔화가 다시 급하게 절상된다면, ‘지난번’ 같은 조치가 필요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번’은 9월 말~10월 초 실시된 일본의 경기부양 정책을 가리킨다. 당시 일본은 기준 금리를 사실상 0%로 낮추고, 5조 엔 규모의 민간 보유 증권을 사들여 통화량을 늘렸다. 또 2조 엔 규모로 달러를 매입해 엔화 가치를 낮추었다. 이는 올 들어 달러화가 엔화에 대해 13%나 절하됨으로써 일본 수출시장에 적신호가 울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13% 절하는 미국이 양적 완화를 단지 암시한 것만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미국의 양적 완화로 엔화 가치가 다시 절상되었을 때 간 나오토 총리가 경기부양 정책을 펼친다면,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유럽과 신흥국들이 비슷한 정책을 실행한다면 세계는 1930년대와 비슷한 환율·무역 전쟁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11월11일 개막한 G20 서울 정상회의는 이런 상황에서 열렸다. ‘경상수지 목표제’와 ‘시장결정 환율제’가 핵심 의제였다.

G20 서울 정상회의 후 조화에서 갈등으로

11월12일 오후 발표된 ‘G20 서울 정상회의 선언문’은,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 자본주의가  ‘조화’에서 ‘갈등’으로 전환했음을 확신시키는 문건이다. 시장결정적 환율제와 관련해 각국 정상들은 “경쟁적인 자국 통화 절하를 삼가면서” “더욱 시장결정적인 환율 시스템으로 가자”라고 합의했다. 또한 “선진국들은 환율의 지나친 변동을 경계할 것”이며, 이런 조치는 “일부 신흥국들이 직면한 자본 이동의 지나친 변동성을 경감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청와대 제공메르켈 총리(왼쪽)의 독일과 룰라 대통령의 브라질은 미국의 ‘양적 완화’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원칙에 따르면 중앙은행은 외환을 사들이는 방법 등으로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는 경제 운용의 기본 원칙으로, 강력한 외환 및 자본 통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 같은 나라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다. 더욱이 이 선언대로라면 미국은 양적 완화 계획을 당장 철회하는 것이 옳다. 미국이 양적 완화를 실시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도 다른 선진국 및 신흥국들의 통화는 달러화에 비해 크게 절상되었다. 예컨대 브라질 레알화는 2009년 이후 달러화 대비 39%나 절상되었다. 이로 인해 유입되는 외자에 6% 세금을 부과하지만 자본 유입은 계속된다. 이런 상황인데도 초강대국 미국은 “환율의 지나친 변동을 경계하겠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더욱이 10월25일자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트리뷴〉 보도에 따르면,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위안화 절상에 합의했다는 정보가 유력하게 떠돈다. 이후 5년 동안 위안화를 매년 7.8%씩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5년 동안 40%에 달하는 절상 규모다. 이 기간 미국은 수출을 늘리고, 중국은 내수를 늘리는 구조조정에 성공한다면 양국 간 윈윈 게임이 된다.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다른 신흥국들이다. 자칫 시장결정 환율제는 신흥국들의 통화 주권을 박탈하는 규범으로 악용될 수 있다.

한편 ‘경상수지 목표제’에서는 지난 경주 회의 당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제안한 목표 수치 ‘GDP의 4%’(경상수지 흑자를 GDP의 4% 이내로 조정하는 조치)가 삭제된 대신 이 제도의 ‘도입 절차’가 규정되었다.
 

ⓒ시사IN 조남진서울 G20 정상회의 하루 전인 11월10일, 회의장을 에워싼 철조망 옆을 경찰들이 행진하고 있다.

선언문에 따르면, G20은 먼저 산하의 ‘실무 그룹’이 ‘지속적인 대규모 국제수지 불균형(persistently large imbalances)’을 가리는 기준, ‘유도적 가이드라인(indicative guideline)’을 내년까지 작성해야 한다. 이 기준(유도적 가이드라인)에 따라 특정 국가들이 국제수지 불균형의 원인이라고 평가되면, 이에 따른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실행이 힘들다. 우선 ‘유도적(indicative)’이란 용어 자체가 ‘강제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유도적 가이드라인(‘불균형의 원인’ 국가를 가리는 기준)을 작성하는 과정부터 논란에 휩싸일 것이다. 어쩌면 작성 과정 그 자체가 세계 환율·무역 전쟁의 일환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더욱이 그대로 실행된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이 조치의 궁극 목표는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는 것이고, 이에 따라 ‘불균형 주범’으로 평가된 국가는 자국 경제를 구조조정해야 한다. 예컨대 통화·재정 긴축 따위 수단으로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절상해 흑자 규모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

이는 금리를 높여 중소기업을 궁지로 몰고, 재정긴축으로 복지 혜택을 축소하는 정책으로 직결된다. IMF 구제금융 조건과도 비슷하다. 또한 신흥국 처지에서 높은 외환보유고는 외환위기에 대한 보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경상수지 흑자를 줄여 외환보유고를 축소한 뒤 외환위기라도 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책 없이 주권국가의 고유 권한인 재정·통화 정책까지 제한하며 경상수지를 줄이는 방안을 어떤 나라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는, 세계 자본주의가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국은 재정·통화 정책을 통해 자국의 경기를 부양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모든 나라가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경우 파국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1940~1950년대처럼 미국이 각국의 이해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공정성 시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일정한 합의를 도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 없는 정상회의 선언문’은 세계가 글로벌 무역·환율 전쟁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더 커졌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이는 의장국인 한국이 회의를 잘못 주재해서 발생한 사태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G20 서울 정상회의라는 계기를 만나 돌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자본주의는 서울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길을 잃었다는 것이 서울에서 확인되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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