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입의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자연스레 옷깃을 세우며 종종걸음을 치게 되었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이 “거의 다 왔다”라며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미로 같은 골목을 돌고 돌아 계단을 올랐다. 잠깐 멈칫. 여든둘의 노인이 오르내리기에는 가파른 높이의 계단이었다. 서울 창신동의 한 이층집. 거기, 전태일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이소선 여사는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바닥 한번 만져봐라. 따끈하냐, 어쩌냐?” 인사도 채 마치기 전에 바닥 온도부터 재보라고 성화였다. 영문도 모르고 손을 장판에 얹었다. 바닥은 따뜻했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언론에 실린 ‘코끝을 얼게 하는 옥탑방에 전태일의 어머니가 산다’라는 내용의 글이 이 여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를 엄마처럼 살피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욕 먹이는 것 아니냐”라고 이 여사가 말했다.

ⓒ시사IN 안희태이소선 여사는 올해 여든 두 살이다.
이 여사는 대개 보일러를 뜨겁게 켜두지 않는다. ‘자발적 불편함’은 이 여사가 여든두 해 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돈이 없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여사는 “노동자들이 더 곤란해지는데…. 그이들이 길거리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윗도리 하나 더 챙겨 입는 것도 미안하고, 방에 불 많이 넣고 뜨끈하게 있는 것도 죄스럽다”라고 말했다.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이 여사에게 세상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이다. 아들이 풀빵을 사주던 어린 여공들이 비정규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여사는 “태일이가 살았으면 비정규직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얼마 전 기륭전자 노조 조합원들이 다시 단식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여사는 또 한번 가슴을 쳤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벌써 1800일 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여사는 “몸이 불편해 거동하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벌써 수십 번을 다녀왔다. 생각만 하면 (머리) 뒤꼭지가 뻣뻣하다”라며 힘 없는 다리를 주물렀다.

아들과 함께 산 세월보다 가슴에 묻고 살아온 세월이 곱절이다.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엄마가 꼭 대신 해주겠다고 약속해줘”라던 아들의 마지막 유언은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 문신처럼 새겨졌다. 지난 40년간 이 여사는 아들을 대신해 거리에서,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간 아들을 대신해 수많은 노동자의 ‘엄마’로 살았다. 온몸으로 역사를 쓰며 살아온 한 평생이었다. 이소선의 삶은 곧 전태일의 삶이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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