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낸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2005년 보수 누리꾼과 벌인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태일은 노동자판 예수다. 자기를 위해 죽은 게 아니다. 불쌍한 여공들이 다락방에서 피 토하고 죽는데 왜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 근로기준법은 왜 두었고, 노동부는 뭐 하고 있느냐. 이걸 계속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사람 도와주는 게 우파다.”

당시 청계천에 전태일 동상을 설립하는 것을 두고 한 누리꾼이 김문수 지사에게 “좌파의 상징 전태일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김문수씨가) 전태일을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것 아니냐”라며 ‘공격’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재야 노동운동가에서 보수 정당 정치인으로 ‘화려한 변신’을 한 김문수 지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 자기의 이념과 가치를 부정하는 말을 해왔다. 그런 그조차 망설임 없이 ‘예수’의 반열에 올리는 이가 바로 전태일이었다.
 

ⓒ이선옥 제공서울여고 학생들이 지난 9월 청계천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서 40주기를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태일이 형은 내 인생의 좌표다. 종교인들은 힘들 때마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떠올리지만, 나는 전태일을 생각한다. 내가 그만큼 힘들까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한다”라고 말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좌우를 떠나 전태일은 한국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상징이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전태일을 잘 모른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라고 딱 한 줄 언급된 것만으로는 젊은 세대가 그 죽음의 의의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이잖아요. 나랑은 같은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는. 그냥 〈전태일 평전〉 같은 거 읽으면서 멋있는 분이다, 이런 생각도 들고. 위인전기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라는 청소년 인권활동가 어쓰(19)의 말이 전태일에 대한 요즘 세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음식점 서빙 따위를 하며 살아가는 어쓰에게 전태일은 오히려 종교적 표상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청소년 노동자’이다. 엄연한 ‘노동자’를 ‘아르바이트생(알바생)’ 따위로만 인식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활동을 주로 해온 어쓰에게 1970년과 2010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 알바와 백수의 노동조합을 자처하는 조직 ‘청년유니온’ 김영경 위원장(31)의 생각도 일맥상통한다. 미싱공과 알바생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삶은 똑같기 때문이다. 김영경 위원장은 “동료 미싱공을 도와주려 했던 전태일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편의점 알바생을 보고서도 어떤 물건을 살까만 따지지, 그가 최저생계비도 못 받는 노동자임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소외감이 더 커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전태일재단 제공1970년 11월, 스물셋에 유명을 달리한 전태일.

젊은 칼럼니스트 김현진씨(〈시사IN〉 ‘펫다이어리’ 필자)는 “전태일 열사가 요즘 태어났으면 나눠줄 풀빵도 엄청나게 필요했을 테고, 분신을 해도 몇 번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대다수 노동자의 삶은 점점 열악해지는데 사회적 관심은 점점 옅어가는 탓이다. 그 자신이 녹즙 배달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김씨는 “2010년에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어쩌면 열사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훌륭한 재단사가 되고자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김현진씨는 전태일과 작은 인연(?)이 있다. 1990년대 초반 이소선 여사 등 전태일 유족이 동대문 주변에 개척교회를 지을 때 담임목사를 구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씨의 아버지가 면접을 보러 갔다. 하지만 보수적이던 김씨 아버지와 성향이 맞지 않아 서로 언쟁만 벌이다 얼굴을 붉히고 돌아왔다. 이로 인해 이소선 여사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던 김현진씨는 지난해 이소선 여사에게 양털로 짠 옷감을 선물하는 것으로 마음 빚을 갚았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전태일 평전〉(평전)을 다시 읽었다. 대학생이던 1988년에 읽고 20여 년 만이었다. 민주노총이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 ‘우리 다시 전태일이 되자’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펼친 ‘평전 읽기 운동’의 일환이었지만 감회가 남달랐다. 김 위원장은 “평전을 다시 읽으며 전태일이 도와준 여공이 현재 비정규 노동자들이라고 느껴졌다. 특히 전태일이 남긴 유서가 마치 십계명처럼 가슴에 남았다. 민주노총이 그들만의 리그가 된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평전 읽기 운동’에 힘입어 〈평전〉은 올해에만 2만 부 가까이 팔렸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전태일 기리기’에 청춘을 바친 이형숙씨는 얼마 전 〈평전〉을 읽은 중학교 3학년 아들로부터 “전태일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라는 말을 들었다. 어릴 때 〈평전〉을 권해도 도무지 읽지 않던 아들의 반응이라 뜻밖이었다. 아들은 그동안 전태일을 ‘엄마 고생시키는 사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형숙씨는 “내 인생에 전태일은 어려운 고비의 순간마다 늘 판단의 근거가 된 존재였다. 아들이 그걸 알아줘서 무척 기뻤다”라고 말했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울산 동구청장으로 일하던 2004년 말, 공무원노조의 파업이 일어나자 정부는 각 지자체장에게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을 징계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그때 이 위원장이 떠올린 것은 ‘1970년의 청년 전태일’이었다. 이갑용 위원장은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러 노동청에 갔다가 공무원들에게 문전박대당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꼭 34년 된 2004년 11월13일, 공무원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한 것은 전태일 열사에게 진 빚을 갚은 일이었다. 공무원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직자의 부정을 견제하겠다고 선언한 게 왜 죄가 되느냐”라며 징계를 거부했다. 결국 이갑용 위원장은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은 죄로 구청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날로 팍팍해지는 노동 현실에 빛바래기도

KTX 여승무원 등 이른바 ‘장기투쟁 사업장’의 이야기를 엮은 르포 〈그대, 혼자가 아니랍니다〉로 올해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이선옥 작가는 공교롭게도 이갑용 위원장의 아내다. 이씨는 남편과의 인연을 맺어준 게 넓게 보면 전태일이라고 말한다. 1995년 한 매체에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감상문을 공모했을 때 그의 작품이 당선된 것을 계기로 한 노동연구소에 들어갔고, 거기서 현대중공업 해고자였던 이갑용씨를 만났다. 요즘 전태일 40주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씨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적은 보수로 일하면서도 오히려 ‘전태일 관련 일을 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하는 디자이너 등을 보면서 힘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전태일재단 제공세 살 때 찍은 가족 사진(앞줄 오른쪽이 전태일).

전태일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날로 팍팍해지는 노동 현실이다. 〈소금꽃나무〉 저자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전태일 40주년을 기리는 마음이 너무 무겁다”라고 말했다. 전태일 때와 달리 지금 수많은 노동자가 죽어가는데도 그 죽음마저 배제되는 현실 탓이다. 김 지도위원은 “최근에 경주 동국대병원에서 청소부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의도적으로 그 죽음이 외면당하는 것 같다. 언론이나 정권이 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라지면서 서로 자기 삶 챙기기에만 급급해졌다”라고 말했다.

전태일의 ‘친구들’도 40주기를 맞는 심경이 착잡하다. 전태일과 동갑내기로 삼동회(전태일이 만든 평화시장 노동자 친목회) 친구였던 임현재씨는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책임이 무거워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애썼는데,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슬프다. 오히려 고용 형태는 더 열악해지지 않았나”라며 씁쓸해했다. 열두 살 때부터 평화시장 미싱 시다로 일했던 신순애씨도 “따지고 보면 지금이 더 어렵다. 여전히 전태일이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라며 안쓰러워했다.

올해 초 34세 나이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며 노동운동의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판해 노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정승호씨.

그는 올해 노동계가 전태일 40주기 행사를 대대적으로 여는 것에 대해 “우리(민주노총)가 여공(비정규 노동자)에게 풀빵을 사준 적이 없는데 전태일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자는 건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일을 스스로 그만두고 부산의 한 영세 제조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전태일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전태일재단 제공평화시장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오른쪽 첫 번째가 전태일).

김소연 기륭전자 노조 분회장의 휴대전화 장식에는 “소연 동지가 전태일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형우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지난해 성탄절 선물로 준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 40주기를 맞이하는 마음은 어둡다. 6년 내내 싸웠지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비정규 노동자를 위해 싸우지 않았겠나. 전태일 정신이란 바로 비정규 노동자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김소연 분회장의 말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오빠의 꿈 잇는 동생 전순옥씨

전태일이 떠난 지 40년. 김소연 분회장 등 수많은 노동자가 40년 전 전태일처럼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고 외치며 싸워왔다. 노동자가 죽어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싸움과 죽음에 사람들은 과거 전태일처럼 비장하게 공명하지 않는 듯하다. 올해 전태일노동상을 수상한 이백윤 동희오토 사내하청노조 지회장의 말마따나 ‘전태일은 닮고 싶은 사람이지만, 결코 닮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달라진 세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전태일처럼 분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자살 등 ‘개인적 소멸’이 많아졌다. 과거 전태일은 모두를 살리고자 먼저 갔지만, 지금은 그럴 전망이 없다보니 개인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자본이 유도한 것이다. 가령 삼성은 자기 노동자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삼성 외 노동자(하청업체)의 이익은 철저히 분리시킨다.”
 

ⓒ전태일재단 제공전태일의 영정을 껴안고 흐느끼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는 요즘 ‘참 신나는 옷’(참옷)이라는 사회적기업을 운영 중이다. 40년 전 오빠가 그랬듯 28명의 ‘봉제 여공’과 함께 옷을 만들어 판다. 물론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정부가 사회적기업으로 지정은 해놓았다지만 작은 회사가, 그것도 주문 제작 방식으로 양질의 옷만 생산하는 업체가 시장에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다. 더욱이 이곳도 회사라 법적으로 ‘사용자’인 전순옥씨와 직원들 간에 더러 마음이 맞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전씨는 참옷이 자본주의 사회에 하나의 대안이 되기를 바란다. 근로자와 주주가 같은 대우를 받고 경기 불황에도 단 한 명도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는 기업을 만드는 게 그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죽은 오빠의 꿈이기 때문이다.

10월28일 오후, 파업 사태로 회사 측이 직장폐쇄를 단행한 경북 구미 KEC(반도체 기업) 노조 농성장에 경찰 헬기가 들이닥쳐 노조원 여러 명이 다쳤다. 천막농성장이 무너지면서 다친 농성 노조원 중에는 임신부도 네 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전 경찰 헬기가 농성장에 들이닥치기 전 전화 인터뷰에 응한 심부종 KEC 노조 사무국장은 “회사는 식량은 물론 의약품 반입도 잘 안 해주고 있다. 전태일 40주기를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현실이 답답하다. 전태일이 어떤 사람이었던가”라고 말했다. KEC 노조의 파업 사태는 애초 타임오프제 문제로 불거졌다. 지금은 노조가 타임오프제를 수용하기로 하는 등 전향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사측은 파업으로 인한 손실을 묵과할 수 없다며 노조와 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있다. 노조원 중 여성 비율은 80%에 이른다.
 

ⓒ시사IN 안희태2010년 전태일은 동상으로 남아 생전에 일했던 평화시장 옆에 서 있다.

전태일이 몸을 불사르며 준수하라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은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에 피난 가 있던 국회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북한이 먼저 ‘노동법’을 만들기 시작하자 이승만 정부가 일본 노동법을 베껴 ‘경쟁적으로’ 만든 법이었다. 하종강씨(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는 최근 출간된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에서 “1953년에 만들어진 노동법이 지금보다 더 좋은 법이었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공무원·교사 노조를 모두 인정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 금지 조항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전태일 분신 사망 40주기가 서글픈 까닭이다.


 

 


전태일은 노동자판 예수다. 자기를 위해 죽은 게 아니다. 전태일처럼 불쌍한 여공을 도와주는 게 우파의 구실이다. - 김문수(경기도지사)

전태일은 노동청 공무원들에게 문전박대당했다. 과거 공무원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한 것은 전태일 열사에게 진 빚을 갚은 일이었다. - 이갑용(전 민주노총 위원장)

1953년에 만들어진 노동법이 지금보다 더 좋은 법이었다. 교사·공무원 노조를 인정하고 노조의 정치 활동을 보장했다. -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태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노동 현실이 더 어렵다. 노동운동도 새롭게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 신순애(전 미싱 시다)

전태일과 함께 활동하면서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지금도 정권이나 권력이 비민주주의적 행태를 보일 때면 주먹이 쥐어진다. - 임현재(‘삼동회’의 전태일 친구)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비정규 노동자를 위해 싸우지 않겠나. 전태일 정신이 바로 비정규 노동자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 김소연(기륭전자 노조 분회장)

40주년을 기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겁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라지면서 서로 자기 삶 챙기기에만 급급해졌다. - 김진숙(민주노총 지도위원)

요즘 청년들 전태일 잘 모른다. 접하고 나면 다들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미싱공이냐, 알바생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 김영경(청년유니온 위원장)

과거 전태일은 모두를 살리고자 먼저 죽었지만, 지금은 다들 개인적으로 소멸해간다. 이런 현실은 결국 자본이 유도한 것이다. - 홍헌호(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

2010년에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어쩌면 열사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훌륭한 재단사가 되고자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 김현진(칼럼니스트)

기자명 이오성·박형숙·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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