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세대 주택이 즐비한 막다른 골목길 끝.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췄다. 아홉 계단 그리고 다시 세 계단을 더 밟고 내려가자 지상에서 상상하지 못한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정신을 쏙 빼놓는 미싱 소리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멍하게 섰다. 곧 내 시선을 끈 것은 손바닥만 한 창문이었다. 까만 먼지 뭉치 가득한 환풍기가 수명을 다한 듯 쌕쌕 게으르게 돌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흔한 이력서 제출이나 면접 비슷한 절차도 없었지만 문턱은 높았다. 일곱 번째 봉제공장 문을 두드린 뒤에야 취업에 성공했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골목길을 배회한 지 나흘 만이었다. ‘시다’를 구한다는 전단은 골목 곳곳 어디에나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경험도 기술도 없는 20대 후반 여성을 반기는 공장은 없었다.

일손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대다수 공장은 가르쳐봐야 오래 버티지 못할 ‘초짜’보다는 ‘객공(客工)’을 선호했다. 객공은 일종의 프리랜서 미싱사다. 일한 시간이 아니라 완제품 수에 따라 돈을 받는다. 일종의 성과급제다. 성수기(3~5월)와 비성수기(9~11월)가 뚜렷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사업주 처지에서는 월급제 정규 직원을 두는 것보다 경력 있는 미싱사를 필요할 때마다 구해 쓰는 게 이득이다. 그러다보니 신분이 불안정하고 언어 장벽이 있어 일을 가르치기 어려운 이주노동자 채용도 꺼린다고 했다. 사양산업으로 접어든 봉제공장을 지키는 것은 대다수가 장년층이다. 공장에는 최소 경력 30년을 자랑하는 ‘생활의 달인’들만 남아 있었다.
 

ⓒ청계천문화관 제공전태일이 일했던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의 1970년대 풍경. 10대 여공들이 사라진 봉제공장에 지금은 장년층 ‘생활의 달인’들만 남았다.

일단 2~3일 같이 해보자며 일을 허락해준 봉제공장은 간호복·환자복 따위를 주로 만들었다. 33m²(10평) 남짓한 비좁은 공장 안에서 복닥대며 일하는 사람은 미싱사 겸 사장을 포함해 재단사·시야게(다림질)·객공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낮에도 형광등 불빛을 밝혀야 하는 좁은 공장 안에 미싱 2대, 인타 미싱(오버로크용) 2대, 재단기, 다리미 따위가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공장이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객공 아주머니는 좁은 공장 안에 어지럽게 놓인 탁자에 툭하면 부딪쳐 푸른 멍이 들었다. 일하는 시간은 평균 12시간. 보통 아침 8시30분이면 출근하는 이들은 그날그날 주문량에 따라 퇴근 시간이 달라졌다. “이 공장의 근무 환경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라고 재단사 황 아무개씨가 말했다. 한때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했던 정 아무개 사장이 의식적으로 애를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스 장.” 공장 사람들은 기자를 이렇게 불렀다.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외는 사람은 없었다. 평화시장 시절 시다가 많았을 때는 입사한 순서대로 ‘1번’ ‘2번’ ‘3번’ 식으로 번호를 불렀다고 했다. ‘쌩 초짜’가 처음 맡은 일은 완제품 옷의 실밥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간단하지만 낯선 일에 온 정신이 곤두섰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고 앉아 말을 잘 듣지 않는 쪽가위와 씨름했다. ㅅ병원·ㄹ병원·ㅇ병원 간호복과 의사 가운 수백 장이 내 손을 거쳐갔다. 떨어진 색색의 실밥이 옷과 몸에 엉겨 붙었다. 원단 먼지에 연방 재채기를 하자 “옛날에는 버스 타면 코 후비던 사람이 모두 봉제공장 다니는 사람이었다”라며 사장이 웃었다.

쏟아진 주문 탓에 엉겁결에 내 몫이 된 바느질도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사장은 옷 뒷면에 바느질 자국이 나지 않게 단추 꿰매는 방법을 일러줬지만, 잘 따라하지 못했다. 바늘은 종종 단추를 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꿰려 들었다. 바늘구멍이 난 손가락에는 붉은 피가 점처럼 나왔다가 굳어 작은 딱지가 앉곤 했다.

“고생했으니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라는 사장의 말에 ‘좀 쉬겠구나’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애초에 메뉴 선택권은 없었다. 오후 2시가 가까워서야 늦은 점심이 ‘배달’됐다. 철가방 안에는 가장 빨리 배달되는 3500원짜리 백반이 들어 있었다. 출근한 지 다섯 시간 만에 처음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실밥을 뜯던 테이블 위를 대충 정리하고 신문지를 깔자 식탁이 되었다. 허기진 때문인지 ‘먼지 밥’이 허겁지겁 입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밥 먹는 속도가 빨랐다. 점심시간은 채 20분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일하는 시간과 식사 시간의 구분은 따로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미싱 혹은 다리미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이들은 점심 식사 한 끼를 먹는 것으로 평균 퇴근 시간인 오후 8시까지 하루를 버텼다. 간식은 물론 없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드르륵 드르륵 미싱 돌아가는 소리를 뚫고 오후 2시 라디오 DJ가 발랄한 인사를 건넸다. 객공 아주머니가 잰 손놀림으로 미싱에 원단을 넣다 뺐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지하 공장에서 날씨가 좋은지 어떻게 알아.” 우울하다는 한 주부의 사연에도 바로 어깃장을 놓았다. “남편이 편하게 돈 벌어다주니까 복에 겨워 그런다. 쯧!” 30년 가까이 ‘미싱을 탔다’는 아주머니의 혼잣말에서 그녀의 삶이 읽혔다. 이 공장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일이 없으면 수입이 ‘0원’인 아주머니에게는 성수기인 요즘이 바짝 벌 때다. “난 밤새 일하는 것도 좋아”라는 아주머니는 하루 평균 14시간씩 일하고 매달 200만원 정도를 번다.

여전히 멀기만 한 근로기준법

잠시 일손을 놓고 쉬던 재단사 황씨가 내게 “대학 나왔냐”라고 물었다. 엉겁결에 “그렇다”라고 답했다. 황씨가 버럭 화를 냈다. “비싼 돈 들여 공부시켜놨더니 지하 공장 와서 실밥 따고 있어? 내 자식이면 니는 죽었어.” 가방끈이 짧은 황씨는 자식만은 같은 일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밤낮없이 일해온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못하는 자식이건만, 자식을 대학에 보낸 것은 황씨 인생에서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황씨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렇게 밥벌이한다”라고 말했다. 1973년부터 재단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40년 가까이 옷을 만지고 있다. 첫 직장은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인근 양장점이었다. 그 뒤 광장시장과 평화시장을 거쳤다. 황씨는 전태일 동생인 전태삼의 부인 윤매실과 같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전태일을 알게 됐다고 했다. “전태일이 지금에 와서 너무 과장됐다”라며 인상 찌푸리다가도, “그래도 덕분에 일요일날 쉬게 된 게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고맙지”라고 말했다.

일요일 휴무 외에도 변한 것이 있다. 역시 경력이 30년에 가까운 시야게 김 아무개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지금은 사장이 ‘타이밍’(각성제)을 먹이거나, 존다고 실패나 가위 따위를 던지지는 않지”라고 김씨가 말했다. 수십 년 경력을 가진 ‘A급’ 재단사나 시야게 모두 정규직이지만, 가져가는 월급은 경력에 훨씬 못 미친다. 재단사 황씨가 350만원 정도, 시야게 김씨는 300만원 조금 안 되는 돈을 받는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재단사 황씨의 투덜거림이 부쩍 늘어났다. ‘퇴근하자’라는 일종의 신호다. 눈치껏 50ℓ짜리 쓰레기봉투에 자투리 원단을 꾹꾹 눌러담고 청소를 마쳤다. 그러나 월급제가 아닌 객공 아주머니는 무심히 미싱을 밟았다. 전날에도 밤 10시쯤 퇴근했다고 했다.

30~40년 일하는 동안 이들은 토요일에 쉬어본 적도, 8시간 미만으로 일해본 적도 없었다. 사장은 “이런 공장이 다 그렇다”라며 짐짓 체념했다. 2010년 이곳에 없는 것은 ‘어린 여공’뿐이다. 가진 것이 몸뚱이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제각기 나름의 성공을 꿈꾸다 스러져간 시간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다.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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