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렬하고 재미있다.”

케인스 전기 3부작으로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새 책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내린 평가다. 지난 8월 영국에서 발간된 이 책은 BBC·파이낸셜타임스·가디언·옵서버·뉴스테이츠먼 등 유수한 영국 언론에 서평과 인터뷰가 게재되면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선도적으로 비판해온 장 교수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처음 내놓은 책이라는 점이 관심을 끄는 요인인 듯하다. 〈23 Things…〉는 영국에 이어 올가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나오고, 내년 초에 미국 출간도 예정되어 있다. 한국어판은 10월 말 출간 예정. 러시아와 타이완 출판사들과도 계약이 완료되었다.

ⓒ송인호 제공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주로 자유무역론을 공격했던 장 교수는 〈23 Things…〉에서 ‘이단적(heterodox) 경제학자’(파이낸셜타임스 서평이 명명)의 면모를 확실히 드러낸다. ‘전선’을 대폭 확장해 ‘자유시장 경제학’을 전방위로 공격한 것이다. “좋은 경제정책에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든가, “지난 30년 동안 실천된 (자유시장) 경제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을 뿐이다”라고 쓸 정도다. 그러나 옵서버 서평자 존 그레이는 장 교수에 대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반자본주의자는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위기를 예방할 수 있을 정도로 개혁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한다.

〈23 Things…〉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대목은 1990~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영미 신진보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클린턴과 블레어로 대표되는 ‘신진보주의’에 따르면,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등으로 지구화는 ‘되돌릴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래서 ‘진보’는 ‘상품·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 등 서비스 산업 육성’ ‘복지 혜택 축소’ 등을 추진해야 한다. 다만 ‘진보’의 전통적 이상인 ‘평등’은 모든 국민에게 고등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는 방법으로 성취한다고 해왔다. 이하는 영국 케임브리지 현지에서 나흘에 걸친 장 교수 인터뷰 중 ‘신진보주의 비판’ 부분을 재구성한 것이다.

당신은 새 책 〈23 Things…〉에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개도국의 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과도한 금융산업 육성 등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정보통신 등 기술의 발전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서다. 이에 저항하면 ‘너 지금 과거로 돌아가자는 거냐’며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세계는 1900년대 초보다 1950~1970년대에 매우 발전한 통신·수송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각국의 개방 정도는 1950~1970년대가 훨씬 낮았다. 이처럼 ‘어느 정도 개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다. ‘기술 발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시민들이 저항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위한 담론에 불과하다.

세탁기가 어떻게 인터넷보다 더 변혁적인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가사노동을 쉽게 만든 덕분에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세탁기가 (20세기 중반에) 대중화되기 전까지 일하는 여성의 50%가 가정부였는데 이런 직업이 거의 소멸되었다. 또한 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서양에서도 남아선호 사상이 점차 사라졌다. 세상이 바뀐 거다. 또 19세기 전보의 발명도 좋은 사례다. 이전에는 정보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데 2~3주가 걸렸다. 이 시간을 20~30분으로 단축했다. 정보의 속도가 몇 천 배 빨라진 거다. 그러나 인터넷은 이전의 팩스와 비교할 때 메시지 전달 속도를 기껏해야 열 배에서 백 배 올렸을 뿐이다. 인터넷이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런 과대평가가 경제정책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가. 새로운 것에 너무 현혹되다보면 정책을 잘못 쓸 수 있다. 예컨대 ‘정보통신 기술로 국경이 없어진다’며 무리한 개방을 한다든가, 혹은 ‘지식 사회니까 제조업보다 첨단 서비스업을 육성하자’는 정책 담당자들이 좋은 사례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서비스업으로 사는 나라는 없다. (서비스업 강국이라는) 스위스·싱가포르 등도 사실은 1인당 제조업 생산이 세계 5위권 안에 든다. 한국에서도 제조업에 대한 회의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최근에는 ‘후기산업사회론’ 등이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듯하다. ‘후기산업사회’는 대다수 사람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대부분의 생산이 서비스 산업에서 이뤄지는 사회다. 금융·컨설팅 같은 ‘지식 기반 서비스산업’의 발전으로 제조업은 더 이상 예전의 지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조업 쇠퇴는 축하해 마땅한 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말  ‘국민총생산’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떨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단지 제조업 생산성이 서비스업보다 훨씬 빨리 상승하다보니, 가격이 떨어져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10년 전에 컴퓨터(제조업) 한 대 살 가격으로 지금은 서너 대를 구입할 수 있다. 소득에서 컴퓨터 구입비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발 요금(서비스업)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올랐을 것이다. 이렇게 제조업 상품 가격은 내리고, 서비스업 요금은 유지되면서,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든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장하준 교수의 새 책 〈23 Things…〉의 영국판 표지.
정보통신 기술, 후기산업사회론 등에 대한 당신의 비판은 ‘신진보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노동당 출신 블레어 전 총리는 정책 대안으로 교육을 강조한 바 있다. 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로 ‘고부가가치 인력’을 육성하는 한편 ‘기회의 균등’도 강화했다는데. 동의할 수 없다. 경제발전을 위해 교육을 강화하자는 건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 90%는 직장에서 쓸 데가 없지 않나? 교육에는 ‘생산성 높이기’보다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 기반 경제’ 시대라는데,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지식 기반 경제론’은 신화다. 특히 영미 계통 국가들에서 제조업의 소외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본다. 인류의 경제는 언제나 지식 기반 경제였다. 1000년 전엔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였는데 남들이 안 가진 나침반·화약·종이 등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언제나 경제에 중요했고, (지난 30년 동안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세계에서 매우 잘사는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는 1990년대까지 대학 진학률이 OECD 평균의 절반 이하였다.

블레어 ‘교육 정책’에 대한 요즘 평가는?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영국 젊은이 중 3분의 1 정도가 자신의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졸자들이 예전에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없던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순수하게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자원 낭비다. 토니 블레어가 기대한 대로 ‘교육 강화로 생산성이 더 높아졌는가’를 따져보면,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실망스럽다. 서구의 ‘신진보’들은 대학 등 고등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강화해서 ‘기회의 균등’을 이뤄냈다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다른 부문에 대한 복지 지출은 삭감했다. ‘기회의 균등’은 인류의 위대한 업적이다. 장인이나 상인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한국이나 흑백 차별로 흑인이 좋은 직업을 가지지 못했던 남아공을 봐라.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고 피 흘리며 (누구나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이뤄낸 것이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과의 균등’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와서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등하면 상금으로 1조원 받는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물론 ‘한국인이니까 올림픽 출전 금지’보다는 낫지만, 내게는 크게 의미 없는 제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기회는 균등하니까 너도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상급식·무상교육은 좋은 거지만, 학교가 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학생들은 집에서 가정교사나 학원, 부모에게 보충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가정에 어느 정도의 소득이 보장되고 생활이 안정되어야 학생들도 공정한 조건에서 경쟁하며 ‘기회의 균등’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블레어 정책은 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강화하는 대신 다른 복지 혜택은 줄였다. 어떻게 보면 ‘기회 균등’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는 ‘결과의 균등’이 담보되어야 ‘기회의 균등’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과의 균등’을 담보하는 ‘기회의 균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해당 사회의 맥락에서 의미 있는 수준으로 부여되는 사회보장, 즉 복지국가다. 사실 기업에는 파산법이라는 ‘사회보장’이 있다. 기업이 파산을 선언하면, 몇 달 동안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이 해당 기업의 재무상태 등을 심사해서 채권자와 타협을 시킬 것인지, 파산시킬 것인지 결정한다. 기업에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노동자의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제가 있어야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경제도 활력 있게 운영될 수 있다.

가디언 기사에서 세탁기와 포즈를 취한 장하준 교수.
그러나 사회복지 지출을 증액하기보다, 부자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줘서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롭다는 주장이 있다. ‘트리클 다운(적하)’ 효과인데 영미의 신진보주의도 이를 상당히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 지난 30여 년 동안 ‘부자에게 몰아주기’는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도 실패했다. 복지국가들이 건재하던 1960~1970년대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간 3%였다. 그러나 부자에게 몰아준 지난 30여 년의 성장률은 1.5% 내외로 반토막 났다.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파이가 커지는 속도도 줄어든 시기였다. 영국의 경우, 제조업 몰락으로 금융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에 따라 금융산업이 많은 돈을 벌어 세금을 많이 내면 그것을 빈곤층에게 나눠주면서 진보정책이라고 했던 거다. 그러나 금융 규제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인생이 파괴되었다. (금융시장의 압박에 노출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내야 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복지급여를 받아야 하는 시민이 많아져 재정지출이 더 늘어났다. 결국 ‘소경 제 닭 잡아먹기’였던 셈이다. 결국 ‘트리클 다운’, 즉 위에서 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펌프를 사용해서 ‘위’의 물을 ‘아래’로 뿜어내야, 사회가 평등해지고 경제 활력도 회복될 수 있다. 이 펌프가 바로 복지국가다. 클린턴·블레어 신진보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금융산업 집중 육성’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금융 부문의 이윤이 꽤 높았다. 그러나 이는 금융산업이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규제를 폐기하면서 금융업체들이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도록 용인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금융업을 하려고 했다. 우리나라 재벌들만 봐도 어떻게 금융그룹으로 탈바꿈할까, 심각하게 궁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금융센터로 떠올랐던 아이슬란드의 경우를 참조할 만하다. 1985년까지 주식시장도 없었던 아이슬란드는 1990년대 중반 보수당이 집권한 이후 국영 은행 3개를 모두 민영화하는 등, 규제를 완화한 것이 아니라 아예 폐기했다. 이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 15위 수준이던 국민소득이 5위까지 올라가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 이후 밝혀진 실상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의 금융산업은 무리하게 돈 빌리고, 말도 안 되는 담보를 잡고 하면서 돈을 번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도 아이슬란드를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던 분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AP Photo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왼쪽)과 영국 블레어 전 총리가 주도한 ‘신진보주의’는 ‘고등교육 기회의 균등’으로 평등을 성취하려 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비판한 것들은 모두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학’(신자유주의, 정통파 경제학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의 정책 패키지에 속하는 것이다. 〈23 Things…〉를 ‘자유시장 경제학에 대한 사형선고’로 봐도 될까.
내가 사형선고 내린다고 집행이 되겠는가.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학(과 학자들)이 (현실 세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 정부도 1960년대 중반, 당시 금융자유화의 선봉이던 스탠퍼드 대학 매키어넌 교수의 권고로 이자율을 30%로 올린 적이 있는데, 도움이 안 된 정도가 아니라 큰일 날 뻔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사채를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8·3 사채 동결 조처’까지 실시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에도 자유시장 경제학과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가. 그들이 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만든 여러 흐름을 계속 정당화해왔다는 측면에서 책임이 크다. 사실 자유시장 경제학에 따르면 이번에 리먼 브러더스뿐 아니라 모든 금융기관을 파산시켜야 했다. 이자율도 높여야 했다. 그래야 시장 규율이 서고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똑같은 짓을 안 하게 되는 거다.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학자들도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그런 주장을 하지 못했다. 말로만 시장주의 하는 거다. 그런데도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자기 이론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다. 예컨대 미국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온 학생들을 보면 케인스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유시장 경제이론이 모든 것에 다 적용되어야 하고,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중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옳기 때문에 뭔가 잘못되면 이론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었거나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자유시장 경제학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