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수수 혐의 입증을 자신했던 검찰이 첫날부터 복병을 만났다. 다름 아닌 뇌물을 줬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은 것이다. 본격적인 심리가 시작된 11일에 이어 말 바꾸기는 12일 법정에서도 계속 되었다. 왼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왼손에는 두개의 링거액 바늘을 꽂고, 입에는 마스크를 낀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타난 곽 전 사장은 수시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것 같다”라고 말해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재판의 주요 쟁점인 ‘한명숙 전 총리의 5만 달러 수수’ 혐의에 대해서 곽 전 사장은 검찰 조사 당시 총리공관에서 한 전 총리에게 직접 줬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의자에 돈 봉투 두 개를 놓았다. 한 전 총리가 돈 봉투를 챙기는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뇌물 사건의 핵심인 돈을 준 경위가 바뀐 것이다. 보통 뇌물 관련 재판은 증거가 없다. 현금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부는 뇌물을 건넨 공여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면 유죄를 선고한다. 그런데 뇌물을 줬다는 곽 전 사장의 핵심 증언이 흔들렸다.
이에 한 전 총리 측 백승헌 변호사는 “검찰 조사를 한두 번이 아니라 수차례 받았고, 조서도 즉흥적으로 써진 게 아니지 않느냐”라며 검찰 조사 때와 말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곽 전 사장은 “검찰님이 머리가 좋아서, 내가 뭐라고 말하면 종이에 써서 그 내용을 다시 읽어보라고 하고 변호사가 읽고 지장을 찍었다. 몇 자 쓰면 기가 막히게 그대로였다”라고 해명했다. 곽 전 사장은 “검찰 조사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말이 맞느냐는 변호인의 계속된 심문에 곽 전 사장은 말을 더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어제 오늘 법정에서 한 말이 다 맞다. 이게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곽영욱, “돈 직접 줬다→의자에 놓고 나왔다”
곽 전 사장은 ‘골프채 선물’에 관해서도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말했다. 전날 검찰은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은 골프채 선물 의혹을 제기했다. 곽 전 사장은 “2002년 8월 한 전 총리가 여성부 장관일 때 ‘장관직을 마친 뒤 배워보시라’며 골프용품 매장에 함께 가서 장비 998만원어치를 사줬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12일 곽 전 사장은 “골프샵에 (한 전 총리와) 같이 있던 것만 기억난다. 1000만원 어치의 골프 풀 세트를 한 전 총리에게 줬다. 그 외에는 어떻게 줬는지 계산을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라고 말했다. 한 전 총리 측 백승헌 변호사는 “한 전 총리 말에 따르면, 본인이 여성부 장관 재직 시절 오랜만에 곽 전 사장과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가는데 따라가자고 해서 갔더니 골프샵이었다. 골프채를 선물하겠다고 해서 골프를 안 친다고 했고, 성의로 모자 하나만 받았다”라고 ‘골프채 수수’ 자체를 반박했다. 재판장도 “골프채를 줬다는 날이 평일 수요일인데 근무 중에 장관이 골프채를 받았다는 게 이상하다”라고 말했다.
연이은 곽 전 사장의 “그런 것 같다”라는 진술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단 사이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변호인단이 곽 전 사장에게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요구하자, 검찰이 나서 “곽 전 사장은 ‘확실하다’는 표현을 ‘같습니다’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피고를 감싸기도 했다. 순간 방청객석에서는 “친절한 검찰”이라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한편 11일 법정에서 곽 전 사장은 검찰이 강도 높게 수사했다고 말해 검찰을 당혹스럽게 했다. 곽 전 사장은 “검사가 너무 무섭게 조사해 죽고 싶었다. 밤 12시까지 검찰청에서 조사받고, 새벽 1시까지 면담을 했는데 심장병 수술 한 사람으로서 힘들었다. 검사가 호랑이 보다 무서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