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AR-TASS11월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위)이 모스크바에서 총선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드디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차기 대권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러시아에서 푸틴의 후계 구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다. 그가 구축한 절대 권력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레임덕? 어림없는 소리다. 대선이 내년 3월로 코앞에 다가왔지만, 푸틴의 지지율은 70~80%대를 넘나든다. 러시아 헌법의 3선 금지 조항 때문에 푸틴이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정치를 그만두기에는 너무 젊다. 이제 만 55세다. 정치 2선으로 물러나기보다는 정치 일선에서 원숙한 정치를 펼칠 때라는 주변의 기대도 크다. 이것이 ‘포스트 푸틴’이 안개에 싸여 있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은 푸틴 대통령을 비례대표 1번에 올려놓았다. 정당 명부제 투표는 이번 선거에 처음 도입한 제도다. 야당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니키타 벨리흐 정의연합당(SPS)의 전 지도자는 “푸틴은 대통령 직책을 이용해서 여당을 지지하라고 국민을 선동하고,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통합러시아당의 푸틴 후보 등재는 위헌이다”라며, 즉각 대법원에 ‘후보 자격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10월20일 “푸틴 대통령의 총선 출마는 결코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라고 합헌 판결을 내렸다.

통합러시아당의 선거운동은 ‘푸틴 신화 만들기’ 캠페인과 함께한다. 11월21일 청년 대표 5000여 명은 모스크바 루쥐니키 경기장에 모여 ‘푸틴 승리 = 러시아 승리’라고 쓰인 휘장을 내걸고 푸틴 찬성(Za Putin) 포럼을 개최했다. 그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야당을 지원하는 서방과 친서방 성향의 야당을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푸틴은 후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총선과 대선 전후로 완전히 새로운 정부와 환골탈태한 집권층이 태동할 것’이라고만 언급했다.

포럼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푸틴의 사조직 ‘나시(Nashi:‘우리의 것’이라는 뜻)’ 회원들이다. 크렘린 이론가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가 밑그림을 그리고, 푸틴의 측근 바실리 야코멘코가 결성한 이 조직은 민족·국수·애국주의적 성격을 띤다. 성격상 중국 문화혁명 때의 마오쩌둥 홍위병과 유사하다. ‘나시’의 조직원은 15~30세젊은이로서 전국 50개 도시에서 20만명 정도가 활동한다. 핵심 조직원에게는 대학 입학·직장 보장 같은 특혜가 주어지지만, 대신 출석 점검·음주 금지 따위 관리를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푸틴 대통령이 총선에 직접 나선 의도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총선 압승 전략이다. 이른바 자신의 지지층을 당 지지로 끌어들여 통합러시아당을 절대 여당으로 이끌겠다는 것이다. 제5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이번 총선에는 통합러시아당(ER)을 비롯해 공산당(KPRF)·자유민주당(LDPR)·정의러시아당(SR)·정의연합당·야블로코·농업당·사회정의당 등 11개 정당이 난립했다.

주코프 총리, 대통령 된 뒤 푸틴에게 양보할 수도

푸틴의 전략은 주효했다. 10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통합러시아당의 지지도는 과반수를 약간 웃돌았다. 그런데 이후 푸틴의 약발이 먹히면서 지지도가 상승세를 탔다. 11월25일 〈러시아 텔레비전〉이 방영한 총선 여론조사(마지막) 결과를 보면, 통합러시아당 67%, 자유민주당 11%, 공산당 10%로 나왔다. 요컨대 푸틴의 총선 참여로 통합러시아당이 초거대 여당으로 자리를 굳힌 반면, 야당들은 모두 소수당으로 전락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셈이다. 만일 여론조사대로 총선 결과가 나온다면, 통합러시아당은 단독으로 헌법 개정(3분의 2)도 가능하다.

‘포스트 푸틴’의 향배는 어떨까. 서방 소식통들은 대선 이후에도 푸틴이 실권자로 남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푸틴 롱런’ 시나리오를 예상한다. 시나리오는 3선 개헌론, 벨라루시-러시아 통합론, 가즈프롬 회장론, 2012년 재출마론 등 다양하다. 이 중 3선 개헌론이 가장 유력하고 지금도 3선 개헌론에 불을 지피는 푸틴 측  운동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정작 푸틴 대통령 자신은 수차례 이를 부인했고, 차기 대통령에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Reuters=Newsis푸틴을 지지하는 청년 조직 ‘나시’(위)는 과거 중국의 홍위병을 연상케 한다.
푸틴이 총선에 참여하자, 신판 포스트 푸틴 시나리오가 나왔다. 즉 의회를 장악한 후 권력 체제를 내각제로 전환하고 총리를 맡아 실권을 장악한다는 얘기다. 서방 측도 새 버전을 내놓았다. 지난 9월에 임명된 빅토르 주코프 총리가 대통령이 된 다음, 곧바로 사임해 푸틴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양보한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다.

하지만 푸틴과 크렘린 정치 공학자들은 다른 차원의 돌파구를 구상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주간지 〈MN(모스크바 통신)〉의 정치 평론가 비탈리 트레치야코프의 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잡지 45호에 쓴 글에서 이른바 ‘안보서기’(이고리 이바노프 전 외무부 장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의 말에 기초한 것이라며 “푸틴의 관심은 통합러시아당이 아니라 ‘시민회의’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시민회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푸틴이 구상 중인 시민회의는 통합러시아당을 중핵으로 사회 각계각층을 아우르는 ‘대민족회의’ 개념이며, 푸틴의 모토인 ‘강력한 러시아’ 건설에 이바지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을 짜내는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할 집단으로 추측된다. 서방의 시나리오든 러시아 정치 평론가의 시나리오든 푸틴이 내년 이후에도 정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어쩌면 푸틴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자명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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