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지난 9월30일 김계관 부상(왼쪽)과 힐 차관보(오른쪽)가 6차 6자회담 폐회식을 마치고 식장을 나오고 있다.

북한의 한 해는 11월에 시작된다. 매년 11월이면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설계하기 위해 북한의 일꾼이 해외에 많이 나간다. 그 중에서도 베이징은 북한에 ‘세계로 열린 창’이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세상의 정보가 널려 있고, 북쪽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각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올해 베이징에 모습을 나타낸 북한 인사 면면이 매우 이채롭다고 한다. 과거에는 내각이나 당의 경제 부서 일꾼이 많았다. 그런데 올해는 경제와는 무관한 힘 있는 부서의 고위 인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른바 당과 군과 보위부 등의 체제 보위의 최전선에 선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경제 일꾼 뒤에 있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이물질이 섞여 들어오는지 감시하고 막는 게 주 임무였다.

그런 그들이 올해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은 전혀 상반된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이제는 우리도 먹고 살아야겠다. 그 방법을 찾아라’이다. 왜 평양에서는 그 방법을 찾기 힘든가. 2004년 6월 북한 내각이 만든 ‘신경제 발전방안’이라는 게 있다. 일본 간사이 대학의 이 교수가 지난 11월호 〈신동아〉에 일부 목차를 소개한 바 있다. 이영화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나도 목차만 구했다. 내용을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탐문해봤더니, 엉뚱한 얘기가 들려왔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대북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 내 유수의 경제학자를 호텔 방에 한 달간 집어넣고 쥐어짜 당시 그 결과를 책으로 묶어 냈다. 그런데 검토 과정에서 폐기 처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뉴욕에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미국 경제를 논하는 식인데, 그걸 어떻게 써먹냐”라는 것이다. 그들이 베이징에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양에 있으면 올라오는 게 전부 〈노동신문〉에 나온 단어와 문구를 조합한 상투적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경제 뒷전에서 통제에 주력하던 부서의 장급 인사들이 ‘이제 우리도 살아야겠다’고 할 정도로 최근 북한에는 비장감마저 감돈다. 2006년 10월께 북한 측 인사들은 그해 겨울을 걱정했다. 남쪽에서 매년 들어오던 식량 40만t이 중단된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2007년 4, 5월만 되면 북·미 관계도 풀리고 식량 사정도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2007년 4월을 기점으로 선군정치를 뒤로 물리고 경제부흥파들을 전진 배치해, ‘더 이상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최근 〈노동신문〉 사설에 자주 등장하는 ‘강성대국 완성’의 속뜻은 바로 이런 것이다.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사상의 강성대국과 군사의 강성대국은 이루었으니, 이제 경제의 강성대국(먹고사는 문제)만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7년 연말이 다 되어가는 지금, 강성대국은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게 북한 내부의 솔직한 평가다.

강성대국의 완성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완성’이란 대단한 첨단산업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 즉 인간 본연의 욕구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예상키로는 올해를 넘기면 체제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내년 1년을 더 넘기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북한 여론 주도층 내에 팽배하다고 한다.

결국 ‘강성대국의 완성’이야말로 2008년의 지상 과제인 셈이다. 최근 북한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주·객관적 정황들이 지향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북한 내부 움직임과 관련해,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등 기존 대남 조직에 대한 조사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는 이들 조직의 비리 혐의 조사 차원으로 국한해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동안 경제 뒷전에 물러나 있던 북한 내부, 좀더 구체적으로는 김정일 위원장 주변의 힘 있는 부서들의 전진 배치와 이를 위한 환경 정비의 성격이 강하다. 강성대국의 완성을 위한 체제 정비가 시작된 것이다.

‘대내 잉여’가 부족한 북한 처지에서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은 결국 외부 수혈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90년대 내내 북한이 벌여온 사투 역시 이 외부 수혈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까지는 실패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건과 환경이 예상된다. 그래서 ‘제2라운드의 시작’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동안은 물주가 뚜렷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제는 물주를 자처하는 곳이 여러 군데다. 그들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조합해 최대치를 끌어낼 것인가가 바로 내년을 궁리하는 북한 전략가들의 최대 관심 사항이다.

2008년 8월8일 베이징 올림픽이 분수령

시기 구분의 경계선은 바로 2008년 8월8일 시작되는 베이징 올림픽이다. 올림픽 이전과 이후, 중국이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올림픽 이전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가급적 사건·사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든 타이완이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2004년 연말, 중국 공산당 산하 연구소들이 ‘중조일치(中朝一致.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두를 중국화한다는 뜻)’를 키워드로 하는 ‘신 조선전략’을 입안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대북 경협자금으로 40억~50억 달러의 집행을 계획했으나, 올림픽을 염두에 둔 후진타오 주석의 소극적 태도로 기회를 놓친 바 있다. 지난 10월 열린 중공당 17차 대회에서는 ‘올림픽 때문에 중국이 너무 몸을 사리다가 외교적으로 내준 게 너무 많다’는 당내 비판이 들끓었다. 결국 올림픽만 끝나면 ‘북한의 중국화’를 겨냥한 중국의 발걸음이 거세질 것이다.

ⓒ연합뉴스11월15일 한덕수 총리(왼쪽)와 김영일 북한 내각총리(오른쪽)가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했다.
그 반대 진영에 있는 한국·미국·일본에는 독자적으로 확보된 시간이 2008년 8월까지라는 얘기가 된다. 최대 변수인 북·미 관계의 향방은 2008년 1월 중순께면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방북을 결행한 미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공언한 대로 내년 1월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고깔을 벗겨줄지, 아니면 시한을 넘기고 또 미적거릴지가 관건이다.

지난해, 약 2년간 유지돼온 북·중 밀월이 파탄 나고, 10월께부터 북·미 밀월로 대체된 지 1년이 지났다. 그에 대한 북한 측 내부의 최근 평가는 ‘미국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다. 결국 ‘한(1) 달러’도 들어온 게 없지 않나’는 것이다. 북한이 올해 연말까지로 약속한 핵시설 목록 신고서를 한 손에 쥔 채, 미국 측에 테러지원국 해제 ‘날짜’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신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힐 차관보는 그동안 ‘1월 중이면 된다’고 해왔으나 이번 방북 길에는 구체적 날짜를 내놓으라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1월 중 날짜대로 일이 진행되면, 내년 상반기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의 방북, 외교대표부 상호 교환 등 기존 메뉴 가운데 입맛에 맞는 것들로 행사를 치르고,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종전과 평화협정을 둘러싼 쌍쌍 파티를 어떤 형태로든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월 중순까지 날짜가 안 나올 경우,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10월29일 류윈산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으로부터 받은 후진타오 주석의 방중 초청장을 들고, 베이징으로 발길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 얘기가 요즘 베이징에서 슬슬 회자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또다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북·중 관계의 꽁무니를 쫓느라 바쁠 것이다.

사실 북·미, 북·중, 북·일 관계는 대략의 틀이 나와 있다. 그러나 남북 관계는 새 정부 출범이라는 변수 때문에 예상이 쉽지 않다. 최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이나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비롯한 각종 대화가 러시를 이루고 있지만, 그 핵심은 모두 차기 정부를 겨냥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늘 그래왔듯이 1~2년쯤 관망하며 약을 올리거나, 아니면 이제 시간이 없는 만큼 정권 초부터 화끈하게 뭔가 해보거나. 주변 정세를 보면, 내년은 우리에게도 북한이라는 ‘떠나가는 배’를 남한이라는 항구에 붙들어 맬 수 있을지 없을지, 결판이 나는 해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동일하다. 2008년 8월8일까지.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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