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우 대기자

〈시사IN〉 창간호 편집국장의 편지를 쓰던 때가 생각난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오락가락하다 갑자기 하얗게 지워진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는 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이다. 몸에서 힘을 뺀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승엽 같은 대선수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던가.

‘나 때문에 창간호가 못 나올 수도 있겠구나.’

두려움에 떠는데 순간 마법처럼 긴장이 풀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짜증나고 지쳐서 글 서두에 조·중·동에다가 살굿빛 석간신문까지 얹어 한바탕 욕을 하고 나니 발걸음이 경쾌해져 순식간에 글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긴장을 푸는 데는 육두문자가  최고라는 걸. 이승엽 선수도 이 비법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헤매지 않았을 텐데.

어떤 사람은 조·중·동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는데 나는 그 정도로 이 신문들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종종 내 돈 주고 사보기까지 한다. 그 신문들을 읽으면 나같이 인품에 결함이 많은 사람조차도 조금은 깨끗하고 정의롭게 느껴져서다. 요즘 종합편성채널에 눈이 멀어버린 이 신문들을 읽노라면 나 자신이 제법 괜찮은 저널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진다.

시작할 때는 언제나 버겁다. 지금 이 글도 그렇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습니다’ 체로 쓸 걸 그랬나 하며 심하게 갈등했다. 지금이야말로 쇠사슬처럼 휘감아오는 긴장과 어색함에서 탈출할 마법이 필요한 때다. 슬슬 비난의 화살을 쏴보자.

‘어륀지 파동’이 예고했듯이 MB (치하) 학교는 참혹함 그 자체라고 한다. 오죽하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교장이 담임들을 불러 자로 손바닥을 때리는 분위기겠는가. 비리 사학재단, 멸공과 개발 미신에 젖은 교장과 교감 선생님 혹은 주임 선생님, 학교와 선생 위에 군림하려는 못된 관료 등등. 학교 사회의 이 일진들이 마치 제 세상이나 만난 듯 일제히 휘젓고 다닌다고 한다. 경험 많고 열정 있는 선생님들이 넌더리를 낸다.

음 일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엿장수 출신 시아버지가 만든 사학재단의 이사장을 맡은 그 며느리. 엿장수란 직업을 폄하한다고 오해는 마시라. 그분이 워낙 학교를 멋대로 운영하다 보니 그 직업이 회자되는 것뿐이다.

어쨌든 바로 그 며느리 이사장님. 이분이 무식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어느 날 선생님끼리 모여 ‘이지메’ 얘기를 하는데 반색을 하며 다가와서는 이러더라는 것이었다. “어머 우리 때는 일지매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이지매라고 하는가 보지?” 선생님들의 말문을 틀어막았던 바로 이분, 소싯적에 일지매파의 멤버였던 것 같은 이분이  최근 학교 홍보비가 모자란다며 선생님들한테서 강제로 20만원씩을 거뒀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검찰로부터 출석을 요구 받고 있는 김상곤 경기 교육감

검찰이 부르는 걸 보면 김 교육감은 훌륭한 분

이런 분위기이니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같은 분은 구세주나 마찬가지이다. 검찰이 그렇게도 불러들이려고 애쓰는 걸 보면 이분은 훌륭한 분임에 틀림없다.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 MBC 〈PD수첩〉 PD와 작가들, 촛불 집회에 나왔던 평범한 분들-은 모두 검찰과 경찰에 불려다니며 시달렸다. 이 검사님들이 내가 검찰에 잡혀가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라고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잡아가려고 덤비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워낙 유머 감각이 없고 정색을 잘하는 분들이라 농담하기도 겁난다.

김 교육감은 무료급식제와 교장공모제를 밀어붙이는 중이다. 경기도에 학급당 인원 25명 내외의 혁신학교를 50개 정도 지정할 예정이라는데 그 부근 땅값이 뛸 정도로 학부모에게 인기가 좋다. 멀쩡한 4대강에 삽질을 해대고 노회찬 같은 이를 국회의원직에서 떨어뜨리면서까지 재개발에 목을 매야만 내 고장 땅값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교장공모제 같은 작은 혁신만 이루어도 아이들은 몰라보게 행복해질 것이고 집값도 덩달아 뛰게 돼 있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비리 사학재단을 비롯한 교단의 수구세력이 끝까지 머리를 싸매고 막으려는 것이 바로 이 교장공모제이다.

독서 여행 첫 주제를 교육에 관한 책으로 정한 것은 시사IN북이 내놓은 세 번째 책 〈굿바이 사교육〉을 편집하면서 일곱 분의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횡행해 사교육이 더욱 기승하는 교육계에서 달걀로 바위를 부수려는 이분들을 보면서 내가 아는 위대한 다른 선생님들의 얘기도 하고 싶어졌다.

잭 캔필드가 엮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는 믿기 힘든 얘기가 나온다. 미국의 볼티모어 빈민가 학생 200명이 25년이 지난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생활 환경과 장래에 대한 평가서에는 대부분 “이 아이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다”라고 씌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사망하거나 이사한 사람을 제외한 180명 가운데 176명이 대단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직업도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으로 상류층에 진입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찾아 성공한 이유를 묻자 여선생님 한 분을 지목했고, 이제는 나이가 드신 그 선생님을 찾아 기적적인 교육 방법을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였다. 교장이 두들겨 패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이다. 그런 선생이라면 자를 모로 세워 손등을 때려도 좋으리라.

얼마 전 〈1Q84〉라는 다분히 제목 장사 냄새를 풍기는 책을 펴내 한국의 지가를 올린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는 미우라 아야코(작고)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였다. 〈빙점〉이란 소설을 쓴 이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지냈는데 이분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주었다. 학생 수가 한 반에 80명에서 100명쯤 되는 콩나물 시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미우라 아야코 선생님은 매일 방과 후에 아이들에 대한 일기를 썼다.

한명 한명을 떠올리면서 그 애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얘기를 하며, 누구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적었다. 아이들을 고루 세심하게 살피려고 애쓰노라 하지만 하루에 대여섯 명은 도무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면 이름을 따로 적어놓았다가 다음 날에는 반드시 그 애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2차대전 뒤에 자기가 전쟁을 선동하는 군국주의 교육에 일조했다는 자책감에 선생직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격동기의 교사 생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 〈총구〉이다.

2년 전이던가,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 미우라 아야코의 〈신약성서 입문〉이었다. 성서 읽기를 시도했다가 매번 첫 대목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데서 포기했던 터라 반가웠다. 그녀 역시 치명적인 병에 걸리기 전에는 교회와 담을 쌓고 지냈기에 교회와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한 책이었다.

예수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이해 못할 부분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밀라”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두 얘기는 상반되는 듯해 도대체 어느 쪽이 진의인지 알기가 어려웠는데 〈신약성서입문〉을 읽고 비로소 이해가 됐다. 미우라 아야코에 따르면 예수님 말씀은 로마라는 세계 최강의 압제자 밑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중을 위한 처세술이자 정신수양법이다.

앞의 얘기는 힘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이고, 뒤의 얘기는 마음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상대방이 자기에게 한, 딱 그만큼만 미워하라는 뜻이다. 흔히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속으로 그 몇 십 배나 몇 백 배 지독하게 보복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경계한 말씀이다. 이 얘기를 듣고 예수란 분이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자들 탓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나라의 무고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성서 첫 대목이 왜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할까

성서 첫 대목이 어째서 그토록 지루하게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되뇌는지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자기’도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언젠가 환경을 다루는 국제회의에 참석한 인디오 활동가가 자기 소개를 한 30분쯤 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성서의 첫 대목처럼 친가 쪽과 외가 쪽의 조상을 죽 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루하기보다는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얼마나 심각하게 오그라들었는지 실감했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어느 조직에 속하는 뭐하는 사람 정도이지만 예전의 나는 훨씬 장대했다.

아이들이 자기를 마음껏 키울 수 있도록 학교가 도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분이 A. S. 닐이다. 이분은 1921년 영국 런던에서 150km 떨어진 곳에 서머힐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의 세 자녀가 모두 이곳을 다녔다. 나 자신을 포함해 진보건 보수건 자식 교육 문제에 관한 한 대개 위선자란 욕을 먹어 싼데 정혜신 선생만은 예외이다. 정혜신 선생은 신념을 실천에 옮길 때면 으레 부딪히게 마련인 뜻하지 않은 장애물들을 모두 뛰어넘었다.

서머힐은 수업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아이들에게 절대로 수업을 강요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정혜신 선생 부부는 그 꼴을 참아 넘긴 유일한 한국인 부모이다. 정 선생의 막내 아들은 무려 4년이나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녀석 아무래도 크게 될 인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머힐의 교육 방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배우자 중 한 명이 고집을 부리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마지못해 따랐던 아버지나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서머힐에서 뚜렷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정 선생 부부만큼 서머힐의 교육 방침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이들도 없는 만큼 그 자녀들은 복 받았다.

조너선 코졸에 따르면 일제고사는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 도움이 되는 어떤 정보도 가르쳐주지 못하고 다만 아이나 학급·학교에 성공 혹은 실패라는 딱지를 붙일 뿐이다.

무려 40년쯤 전에 쓴 닐의 저서 〈서머힐〉은 지금 읽어도 많은 영감을 주는 책임에 틀림없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의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순수성과 그 만족감을 과소평가하고(그는 책에만 매달리는 인간을 경멸하는 듯하다), 프로이트의 가설을 지나치게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는 인물이다. 그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목적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고 그 이유는 행복한 사람은 배우자나 자식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지 않고,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전쟁을 찬양하거나 흑인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강요하는 교육’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과 같은 비극으로 비친다. 매 맞는 아이는 두들겨맞는 강아지처럼 부리기 쉽고 위선적이 된다. 훈련받은 개처럼 어린이가 지나치게 떠들어선 안 되며 지시에 순종하고 (어른이)편리한 시간대에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질색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43년 베를린의 템펠호프 벌판에서 훈련사 히틀러가 명령으로 휘파람을 불자 수십만의 개들이 슬슬 기면서 꼬리를 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교장 밑에서 교육받은 아이는 다른 학교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 양태를 보인다. 교장인 닐이 야속하게 생각할 정도로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모든 규율을 결정하는 전체 회의에서 교장이 낸 안건은 번번이 부결되고 만다. 한번은 옆 학교와 크리켓 경기를 하기로 했는데 그 학교에서 가장 잘하는 친구가 병에 걸려 시합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자기들도 회의를 열어 자기네 팀에서 가장 잘하는 친구를 빼기로 했다. 이런 결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이 서머힐이다. 닐에 따르면 인류의 희망은, 질투심 강한 하느님과 같은 부모들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어린이의 편을 들고, 정말로 어린이가 무얼 원하는지 감안해 행동할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굿바이 사교육〉에서 허아람 선생이 강추하셔서 만나게 된 이가 조너선 코졸이다. 이분은 문체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가르치는 타고난 선생님이었다. 어찌나 어휘를 골라 품위 있게 쓰는지 이분이 쓴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내내 공기 맑은 산골짝에 들어와 있는 듯 기분이 청량했다. 그렇다고 이분이 제기하는 문제가 말랑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미국의 공립학교 현장을 휩쓰는 신자유주의와 온몸으로 맞서는 투사인 동시에 젊은 교사들에게 함께 맞서 싸우자고 손짓하는 뛰어난 선동가란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의 젊은 교사에게 이 책을 바쳤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는 단순히 교육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한국의 나이 든 기자에게도 충분히 유익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직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어휘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럴 듯한 어휘 뒤에 숨은 구린내 나는 의도를 통렬하게 비웃는다. 그는 교육정책의 권위자임을 자임하는 자들이 교사를 “나라 경제에 ‘부가가치’를 펌프질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그는 교사, 특히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는 글로벌 기업의 하수인도, 국가를 위한 훈련 교관도 아니며,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여기도록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성공적인 교장은 최선의 교육 관행을 모방하고, 교육의 목적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며, 협조적인 교육 과정에 착수하고, 명확한 교육 목표를 언명하고…” 따위 죽은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의 참신한 언어와 언어의 진정성을 지키라고 충고한다.

그의 책이 주는 위안은 머리 굳은 교육 관료와 행정가들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고, 절망은 미국의 수많은 멍청한 행정가들이 만들었다가 실패해 너덜너덜해진 정책이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제 학력고사인데(조너선 코졸은 전국 규모의 고부담 시험이라고 표현했다), 일제 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을 해고하고, 해고하지 않은 교육감을 감옥에 보내지 못해 난리를 피우는 이들에게 예수님 말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상기시키면서 조너선 코졸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첫 임기 중에, 고부담 시험에 반대하는 교사들은 지적·윤리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가 평가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학생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가장 가난하고 인종분리가 심한 지역의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가혹한 시험에 대한 훈련 교수법이 시행된 뒤부터 명문 스토이베산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조너선 코졸에 따르면 일제고사는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 도움이 되는 어떤 정보도 가르쳐주지 못하고 다만 아이나 학급·학교에 성공 혹은 실패라는 딱지를 붙일 뿐이다. 일제고사에 반대했다고 해서 해고된 젊은 교사에게도 조너선 코졸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교사들은 교직에 들어서기 전에는 예기치 못했던 책임을 떠안아야 합니다. 이 책임 가운데 하나는, 제 생각입니다만,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교사로서의 직업윤리’로 간주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아무리 수줍고 자기 주장에 서투르더라도, 정의를 위해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투사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쳤다는 이유로 투쟁의 장을 떠날 권리가 없습니다.…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을 즐겁게 채울 수 있는 권리를 지켜내려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어렵고 큰 과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끝내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모든 용감한 약자에게 주는 조너선 코졸의 메시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즐거움과 다정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근 문예출판사는 조너선 코졸의 또다른 명저 〈야만적 불평등〉(‘미국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을 펴냈는데 이 책도 꼭 읽어볼 생각이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mjw2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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