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뉴욕 브로드웨이 무대기술자들이 선전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고 파업 시위를 하고 있다.
11월20일 오랜만에 찾은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 뮤지컬 극장가는 여전히 분주했다. 그러나 관광객이나 한껏 멋을 낸 뉴요커 대신, 평소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을 무대 설치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며 북적이고 있었다. 파업 열흘째다. 현지 방송사가 무대기술자 노조인 ‘로컬원’ 조합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44번가 마제스틱 극장에서는 여전히 〈팬텀 오브 오페라〉 간판이 붙어 있고 바로 옆에 〈레 미제라블〉 공연장 간판도 여전하다. 하지만 길 건너 그린치 상영관 앞에 도착해보니 모든 극장 앞에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다. 이번 파업을 주도한 로컬원 조합원들이 그 안에서 피케팅을 하고 있다. 45번가의 상황도 마찬가지. 네온사인이 화려한 〈라이온 킹〉 공연장 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관객이 아닌 무대기술자 조합원이었다.
뉴욕 시 감사원장은 11월20일 성명을 내 이번 파업으로 매일 200만 달러(약 20억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극장 측은 손실액을 1700만 달러(170억원)로 잡고 있다. 블룸버그 뉴욕 시장도 평소 입버릇인 “걱정은 무슨(Me worry?)”이란 말 대신 진중하게 이번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 물밑 중재에 나섰다고 현지 언론은 전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무대기술자 노조 조합원들에게 이번 파업은 생계가 달려 있는 문제다. 이것은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작가조합 파업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할리우드 작가조합 파업은 DVD 수익 배분 문제 등 이익 분배와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로컬원 조합원들의 파업 사유는 일터에서 쫓겨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 때문인지 로컬원 조합원들은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의 파업을 연결 짓는 기자의 질문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브루스 코헨 대변인에게 극장주-프로듀서 연합이 주장하는 노동 유연성 문제를 묻자 “로컬원은 이미 노동 유연성을 받아들인 상태이다. 그들이 더 많은 유연성을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언론을 피해 다니는 집행부 간부 중 노조위원장에 이어 로컬원 2인자로 불리는 윌리엄 월터스 부위원장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속한 국제무대근로자노조(IATSE) 산하의 8~9개 노조가 동맹파업 중이다. 극장에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일부일 뿐이다”고 말했다.

이번 파업의 핵심은 고용계약 조건을 바꾸느냐 마느냐이다. 극장주-프로듀서 연합과 로컬원은 4시간을 기본 단위로 용역 계약을 맺어왔다. 대형 뮤지컬의 경우 목수 15명, 전기기술자 15명, 기타 5명의 무대기술자가 필요하다. 몇 명을 투입해야 하는지는 로컬원 측이 결정해왔다. 극장주는 목수들로 무대가 북적거리고 있으면 전기기술자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고, 무대 정리 등에 필요한 인력을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고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프로듀서가 원하는 인원을 원하는 시간만큼 쓰겠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대형 뮤지컬 대부분 공연 중단

로컬원의 주장은 다르다. 자신들은 이미 비정규직 시급 노동자 처지라는 것이다. 코헨 대변인이 “우리는 이미 노동 유연성을 받아들인 상태”라고 말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양보할 만큼 했음에도 극장 쪽에서 더 많은 양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노조는 극장주-프로듀서 연합의 새 계약 조건을 받아들일 경우 전체 노동자의 38%가 퇴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극장주-프로듀서 연합과 로컬원이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지난 7월이다. 극장 9개를 소유한 뮤지컬 재벌 네더랜더가 “앞으로 노조를 통하지 않고 무대기술자와 직접 개별 계약을 맺겠다”라는 발표를 한 직후다. 노조는 네더랜더 사 극장에 인력을 공급하지 않겠다며 파업 가능성을 언급했고 네더랜더도 이에 맞서 노조에 공문을 보내 “파업을 시작하면 직장 폐쇄를 할 것”이라고 정면 대응했다. 당시 샤롯데 마틴 극장주-프로듀서 연합 간부는 “노조가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파업을 결의한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EPA‘브로드웨이 파업’에 때맞춰 할리우드 작가 노조도 파업을 하고 있다.
파업 열흘째인 20일. 로컬원 노조 집행부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주 파업을 끝내기 위해 양측 집행부와 극장계 및 극장노조의 거물급이 모두 모였지만 결국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이와 함께 노조 내부의 강성 세력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월터스 로컬원 부위원장이 현재 동맹파업 중이라고 주장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의상 담당자들의 노조 ‘워드로브’의 간부 중 한 명은 익명을 전제로 필자에게 “아직도 공연 중인 뮤지컬이 있다. 이런 웃기는 파업이 어디 있나. 로컬원 집행부는 그린치라는 뮤지컬의 극장주가 극장주-프로듀서 연합의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공연을 허락했다”라고 말했다. 이 간부는 “우리는 아직 동맹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문제 때문에 지금 회의 중이지만 모든 뮤지컬을 극장에서 내릴 때만 참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로컬원의 조합원은 목수, 전기 기술자, 무대장치 운영자 등 300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목수와 전기 기술자가 주급으로 평균 1600달러(약 160만원)를 받고 크랭크 등 무대장치를 조작하는 조합원들은 1200달러(약 120만원)를 받는다. 이들의 주된 수입은 야근 등 시간 외 수당이다. 조합원들은 휴일 등을 반납하고 리허설을 위해 밤을 수시로 새야 하기 때문에 연평균 7만 달러(약 7000만원) 수입은 많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번 파업으로 큰 불편을 겪고 있다. 거리의 호객꾼들이 8개 남은 뮤지컬 티켓을 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대형 뮤지컬 대부분이 문을 닫아 관객의 반응이 없는 편이다. 워싱턴에 학회 참석차 들렀다는 대학원생 김학수씨(31)는 “파업을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혹시나 하고 와봤다. 한국과 달리 미국 무대 기술자들이 극장 소속이 아니라는 점이 생소하다. 파업하면 극장의 손해가 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일행인 이낼리야 씨(26·대학원생)는 “〈헤어 스프레이〉라는 뮤지컬을 보려고 왔는데 못 봐서 아쉽다”라고 말했다. 오클라호마에서 관광차 뉴욕을 찾은 리사 매넬 씨는 “뮤지컬 없는 뉴욕이라니 말도 안 된다. 〈커튼스〉라는 새 뮤지컬을 보려고 했는데 이번 여행을 망친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로컬원이 열흘 동안 파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시민들의 암묵적 지지 덕분이다. 커뮤니티 신문에서 기자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다이앤 씨(맨해튼 거주)는 “파업은 노동자들의 특권이다. 지금의 미국 사회는 노동자들이 흘린 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아드리안이라고 밝힌 한 여성 뉴요커는 파업 현장에 나와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녀는 “무대 뒤에서 땀 흘리는 이들 없이는 당연히 화려한 뮤지컬도 없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고용이 낳고 있는 부작용은 세계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최근 한국은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미국 브로드웨이 노동자들이 벌이는 파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이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기자명 뉴욕=한정연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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