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는 말할 나위도 없다. 체 게바라에서부터 5세대 아이팟 나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르는 게 없다. 오죽하면 소설에 이런 대목이 등장할까.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 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김영하, 〈퀴즈쇼〉)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더 윤리적이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스타벅스 같은 다국적 커피 체인에서 커피를 마시기보다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착한 소비자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고, 뉴스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떠들어댄다. 그뿐인가. 이제는 기업이 돈만 벌겠다고 덤벼서는 망하기 딱 좋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착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요즘 잘나간다는 경영학자들이 입을 모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지난 10여 년 동안 불안정 노동을 폭발적으로 양산하고 비정규 노동자를 폭력 진압하고 한·미 FTA를 밀어붙였던 정권에게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그 정권을 옹호했던 사람들조차 정권이 바뀌자마자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흉은 바로 신자유주의와 MB 정권”이라고 핏대 세워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빵빵한 지식과 윤리의식까지 갖춘 시민이 이렇게나 늘어났는데 어째서 세상이 이 모양일까. 어째서 촛불은 꺼지고 MB의 지지율은 고공비행을 계속하는 걸까. 뉴스 보다 열불이 터지는 건 MB 때문이며, 경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은 요즘의 기묘한 날씨가 다 지구온난화 때문인 것만큼이나 명백한 일인데 말이다. MB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 간단한 상식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선명성이 아니라 구체성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지구온난화·MB,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우리가 처한 사회적 문제들이 거의 설명된다. 참 선명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 설명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너무 추상 수준이 높아서 정보값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과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의 설명은 “날씨가 참 좋네요”보다도 무의미한 말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에 대해, 지구온난화에 대해, 그리고 MB에 대해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정보 중에서 엄밀히 검증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사회의 모순을 한 가지 원인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태도는 과학적이지도 않거니와 대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런 태도는 초월적 지성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으로 귀결되거나, 신자유주의가 사라지면 또는 MB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물구나무선 미륵신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현란한 개념어나 최신 정보의 습득 따위가 아니다. 이를테면 과연 우리가 옆집 아주머니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발설하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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