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10월30일 베트남을 방문한 북한 김영일 총리가 베트남 해방군 모자를 쓰고 호치민 초상 앞에 섰다.
경제 회복을 위한 북한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10월16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 농득마인 서기장이 5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데 이어, 김영일 북한 내각 총리가 26일부터 4박5일 동안 북한 기업인 30여 명을 이끌고 베트남의 개혁·개방 현장을 방문했다. 10월30일자 로동신문은 변화한 환경에 맞게 자력갱생의 원칙을 새롭게 구현해야 한다고 외쳤다.

로동신문은 이른바 ‘21세기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과학기술에 기초한 자력갱생, 실리에 기초한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우리 당이 요구하는 인민경제의 활성화는 단순히 지난날의 것을 회복하는 사업이 아니라 전면적인 기술 재건을 동반하는 사업이다”라며 다른 나라의 첨단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문했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조선 속에 세계가 있다”(2001년 12월30일자)라고 하더니 이제는 “세계 속에 조선이 있다”라고 외친다.

북한은 19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도 한다. 1990년대 내내 연평균 -3.8% 경제성장을 함으로써 국부는 반 토막이 났고, 매년 식량이 150만t 이상씩 부족해 경제는 원조 경제로 전락해버렸다. 산업생산 가동률이 평균 30% 내외로 떨어졌거나 수공업 기술 수준으로 회귀해버렸다. 주민의 70%는 미배급 상태로 내몰림으로써 자생적으로 시장경제가 확산되었다.

따라서 2002년 7·1경제관리개선 조처는 불가피했다. 북한은 7·1 조처를 통해 경제 운용 도구로 시장경제 기능을 적극 도입하고 종합시장을 양성화하며 경제의 분권화·화폐화를 추진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회적 공짜’를 많이 제거했다. 심지어 물질 인센티브 제도도 적극 허용해 제도적으로 생산성 차이에 의해 발생한 소득 격차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북한 당국자의 말대로 광복 직후 토지 개혁에 버금가는 경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7·1 조처 이후 5년의 세월은 북한에 ‘단맛’보다는 ‘쓴맛’을 더 많이 안겼고, 북한 경제를 결코 ‘빈곤의 함정’에서 구출해내지 못했다. 일부 산업 현장에 노동성 제고와 생산성 증대를 가져오고 공급 부족 문제에 숨통을 틔웠지만, 결과는 만성 인플레와 극심한 빈부 격차, 재정 위기의 확대를 가져왔다. 더욱이 시장경제 공간을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와 달리 국가기관, 국영기업, 주민의 가계 살림살이 모두가 시장경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양상을 초래했다.
산업경제는 회복되지도 않은 채, 중국의 유통자본에 내수시장을 내어주고 그나마 남아 있던 산업경제 공간마저 위축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허용된 시장경제를 통해 ‘돈벌이’에 맛을 들이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터진 주민은 심한 사상 통제 속에서도 시장경제 활성화를 더욱 열망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서는 특단의 조처가 절실한 상황이다. ‘실리사회주의’ 논리에 의한 부분적인 시장 개혁 실험과 개성공단을 뛰어넘는 경제 개혁·개방이 있지 않는 한 정권의 기반이 더욱 취약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사진공동취재단출근길 평양 시민 모습. 과거와는 다르게 화사한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늘었다.
특단의 개혁 조처 절실한 김정일 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0년대에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북한 사회주의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심에 휩싸여 있었던 같다. 그래서 1996년도에 “나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1997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간부와의 대화 중에는 “외국의 투자와 외자 도입, 이것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문제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는 경제 개혁·개방의 절박성은 21세기 들어서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2001년 1월 새해 벽두에 신사고론을 외치더니 중국 상하이를 방문해 중국의 개혁·개방 성공을 직접 실감하기도 하고, 2002년 러시아를 방문할 때는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 지역 전권대표에게 “더 잘살기 위해서는 경제 개혁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한 데 이어 7·1 조처를 실행했다.

체제 유지를 항상 우선시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고방식에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유심히 살펴보면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6·15 공동선언, 조명록 차수의 미국 클린턴 대통령 면담 이후 발표된 조·미 공동 커뮤니케, 2002년 9월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등 대외 여건이 호전됐음을 볼 수 있다. 즉 남한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 체제가 보장되는 여건이 마련됨으로써 변화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국전쟁 직후처럼 초토화한 북한 경제의 현실에 떠밀려 체제만 보장된다면 개혁·개방을 할 수도 있다는 방향으로 사고의 진화를 보여왔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금이 또 한번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6자회담을 통한 북·미 관계 개선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완성으로 전개된 5년 전의 개혁을 다시 불붙이고자 하는 의도를 여기저기서 드러내는 것이다. 남북 정상의 10·4 선언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남북한 경제협력방안을 합의한 것도 그렇고, 10월20~27일 방북한 EU의 한반도 담당 후베르트 피르커 의원 일행에게 경제의 현대화를 위해 대외협력이 절실하고 남북 간 경제협력이 더욱 진척되어 개성공단 같은 공단이 여기저기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피력하기까지 한 것도 그렇다.

사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10월9일 핵실험을 한 직후인 11월 함경남도 산업 현장을 시찰한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강성대국의 여명이 밝아온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2007년에 반드시 국면 전환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 경제문제 해결에 온 힘을 쏟겠다는 의중으로 읽힌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올 1월17일자 기사에서 “작년 핵실험 성공으로 조선(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의 전략적 목표를 실천해나갈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북한은 올 1월1일 신년 공동사설 이후 모든 언론 매체에서 국정의 최대 과제로 기간산업의 정상화, 인민 생활의 향상을 내세우고 있는 가운데 곽범기 내각 부총리가 “경제 관리를 개선해나가기 위한 사업에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겠다”(민주조선 1월2일자)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연합뉴스지난 8월 함경남도 함흥 목제품 공장을 시찰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두 번째).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와는 달리 올 정상회담 이후에는 남북 경협을 통한 경제 발전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2000년 당시에는 정상회담 직후 로동신문에 “남조선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올해에는 그런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0월16일자 조선신보에 따르면 내각 경제 관료들이 ‘10·4 선언문’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비공식적 정보에 의하면 지방의 하급 관료들도 이제는 살길이 트였다고 큰 기대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짐작컨대 북한은 2002년 김일성 주석 탄생 90주년에 시작된 7·1 경제관리 개선 조처를 탄생 100주년인 2012년도에 북한 경제의 정상화 성취로 연결짓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면 북한은 어떤 방식의 개혁·개방을 추구할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이후 네 차례에 걸친 중국 방문에도 불구하고 이미 2000년 10월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중국 모델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스웨덴 모델이 재미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4년에는 왕정 체제인 태국의 경제 발전 모델에 관심을 표명한 적도 있다. 최근 방북한 농득마인 베트남 서기장에게 “베트남에 가서 도이모이를 배우겠다”라고도 말했다. 이는 북한이 말로만 대규모 경제 지원을 외쳤던 중국에 대한 서운한 감정(〈시사IN〉 8호)이든, 미국과의 관계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베트남 모델에 대한 관심 표명(〈시사IN〉 8호)이든 간에 나름으로 ‘북한식’ 개혁·개방 모델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머릿속에는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의 고수라는 절대 허물어뜨릴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다고 본다. 1990년대 이래 우리식 사회주의는 북한 체제의 현실상 선군정치와 노동당 영도라는 쌍두마차에 의해 유지되어왔기 때문에 북한이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더라도 이 세 가지 원칙만은 절대 과제로 전제할 것이다. 역으로 주민의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만 유지된다면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할 것으로도 보인다.

두 마리 토끼 잡기식 개혁·개방 실험

모순된 두 마리 토끼 잡기 식의 북한식 개혁·개방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 군부가 북한 전 지역의 주유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대풍그룹이라는 외자 유치 전문회사를 차려 대외 자본 유치에 적극 나섰다는 설이 있다(연합뉴스 11월 1일자). 반면, 10월26일 13년 만에 열린 전국 당세포비서대회는 향후 북·미 관계 개선 이후 확대될 경제 개방에 대해 사전에 사상적 점검을 하면서도 이례적으로 전국의 당 세포들에게 경제 문제를 주요 관심 과제로 둘 것을 주문했다. 아울러 본격적인 북한 개발에 대비해 영국 자본을 중심으로 ‘국제김일성기금’과 ‘조선개발펀드’도 만들어졌다는 설이 들린다.

현재의 북한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어떤 개혁·개방 모델을 수립하든 간에, 2000년대 이후 시작된 시장화 과정을 결코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북한 청년 세대들에게 이미 영어 공부와 컴퓨터 교육은 미래의 발전을 위한 필수 과제이다. 남북한 교류 협력은 어느새 북한 엘리트에게 남한과의 협력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최근 방북하고 온 민간단체 관계자에게 북한의 관료는 “지난 7년간 허송세월해서 답답했다. 이제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 조짐은 우리에게 시대적 과제로서 남북 관계가 북한의 변화만 뒤쫓아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주문한다고 생각된다.

기자명 권영경 (통일교육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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