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해룡나고야 시 중심 나고야 역 부근에 있는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앞에 학생들이 통학에 이용하는 스쿨버스가 있다.
“버스를 타고/전차를 타고/우리는 학교 가요~”(조선인 학교 동요)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일본 나고야 역 부근에 있는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정문으로 학생들을 태운 스쿨버스가 속속 도착했다. 스쿨버스는 유치원생과 1~3학년 저학년이 이용한다. 거리가 먼 지역의 학생들은 2시간 가까운 거리를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한다.

“안녕하십니까?”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우산을 쓰고 기다리던 교사들에게 우리말로 밝고 쾌활하게 인사 한다. 교사들도 웃으며 “안녕하십니까?”라며 답례한다. 전철과 지하철을 타고 나고야 역에 내린 학생들도 10여 분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등교하고 있었다. 전철로 등교하는 학생들은 4학년에서 6학년까지 고학년생. 1988년에 신축된 4층 교사에서는 학생들의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2007년 11월 현재 나고야 조선초급학교의 학생 수는 모두 230명.  이 학교는 유치원생이 60명, 초급학교(초등학교)의 학생 수가 170명이다. 나고야에서는 유일한 조선학교다.

이 학교는 3개의 조선인 학교가 통합해 탄생했다. 2000년 4월1일 아이치 제1·제2·제3의 조선초급학교가 통합을 한 다음 나고야 조선초급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통합 당시 학생 수가 230명이었는데, 현재까지 줄지 않고 같은 수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각지에 있던 조선학교들이 학생 수가 줄어 문을 닫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이다. 일단 통합 실험은 성공했다.

“학교를 통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내가 다녔고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멀리 떨어진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불안감도 컸다.”

처음에 어머니들의 불안감은 심각한 상태였다. 2000년 당시 나고야에는 아이치 제1·2·3 조선초급학교 등 3군데 조선학교가 있었다. 나고야의 조선학교들은 일본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후 국어 강습소로 시작해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교사를 건립하면서 학교로 발전했다. 지역 재일동포들이 한푼 두푼 모아 건설한 것이었다. 노점상을 하면서 모은 돈을 기탁한 동포들도 있었다. 일제시기 공부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 1세들은 잃어버렸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야 한다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학교를 일으켜 세웠다. 이 때문에 조선학교에 대해 지역의 재일동포들이 가지는 애착은 남달랐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남아 있던 각 학교의 재정 문제도 심각했다. 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기 전에 발전적으로 학교 사업을 전개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세 학교의 통합 과정을 주도하면서 지켜보았던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교육회의 김영석 상근 부회장의 회고다.

재일동포들, 처음엔 통합 거세게 반대

지역 동포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통합 대상이 되었던 학교의 교육회·학부모 등은 회의를 거듭했다. 일부 흥분한 관계자는 통합 논의와 준비를 진행하는 조직 관계자들에게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온도차가 있었다. 통합의 중심이 된 아이치 제1교 학부모들은 다른 학교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겁났고, 아이치 제2교와 제3교 학부모들은 우리 학교가 없어진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논의를 거듭하고 학교신설준비위원회가 진전되면서 학교를 새롭게 건설한다는 마음으로 모아졌다.”

ⓒ시사IN 안해룡나고야 조선초급학교 보육반 학생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몸풀이하는 모습을 학부모들이 지켜보고 있다.
통합 논의 당시, 학생 수는  아이치 제3조선초급학교가 100여 명으로 제일 많았다. 하지만 1988년 신축한 교사가 있었고, 나고야 역에 가까운 덕에 교통이 편리한 제1교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이후 교명을 나고야 조선초급학교로 바꾸었다. 

리영기 당시 교육회 회장은 새로운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 다른 학교 운영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학교는 지역 동포의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에 이들의 힘으로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포들의 수입은 일본인의 60%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과도한 교육비의 부담을 주는 것은 무리다. 학부모의 학교 운영비 부담을 줄이면서 학교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통합된 나고야 조선초급학교는 학부모들의 운영비를 줄이는 노력과 더불어 스쿨 버스의 증차, 교원 확충, 교실 증축 따위 사업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둬 학부모에게 지지를 얻었고 학생 수가 증가했다. 2001년에는 242명(유치원 73명, 초급 169명), 2002년에는 255명(유치원 80명, 초급 175명), 그리고 2004년에는 265명(유치원 86명, 초급 179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교실이 부족해 증축을 하기도 했다.

학교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1인 3000엔 애교(愛校)운동을 전개했다. 첫해 개인 456명과 단체가 참여해 약 4200엔의 기금을 확보했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든 힘이었다. 학교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년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연간 사업보고서〉를 발간했다.

“학교 재정 운영 상황을 공개해야 지원을 끌어낼 수 있다. 옛날처럼 회의 참석자들에게만 보여주는 것은 공개라고 할 수 없다. 보고서를 책자 형식으로 내는 걸 낭비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공개 정책이 옳았다.” 리영기 회장은 학교 예산안은 물론 연간 재정 수입 내역·찬조금 명단과 금액 등을 담은 연간보고서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과거와는 달리 학교 운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었다. 나고야 조선초급학교의 노력과 혁신은 아이치 현의 다른 학교에서도 모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교육 내용에도 변화를 시도했다. 영어 원어민을 강사로 채용해 국제화에 대응하는 한편 아버지회가 기증한 컴퓨터를 이용한 IT 교육도 강화했다. 컴퓨터 교육은 일본인 강사가 전담했다. 학부모는 물론 시대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60년간 일본에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우리말을 지켜온 민족학교와 민족교육은 현재 새로운 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분단 현실이 무지의 단절을 강요해왔지만 새로운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민족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학교 통합이라는 실험에 성공한 나고야 조선초급학교에 주목하는 이유다.

기자명 나고야=안해룡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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