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적어도 다른 대통령들에 견주면 그렇다. 내가 정치적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았던 시절이 그의 집권기 5년 동안이었다. 물론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유신 잔재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 단독 집권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것을 막무가내로 비판했던 민주주의자들을 나는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그런 ‘더러운’ 거래가 없었더라면, 자유주의 정권 10년은 불가능했을 게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역사와 대화할 줄 안 첫 대통령이었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나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없었으나, 그는 전임자들 누구보다 더 지적이었다. 그가 정치인의 자질로 꼽은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고스란히 체현한 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이었다. 그가 정적들의 비판 속에서 꿋꿋이 수행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이미 그의 재임 중에 긍정적 효과를 낳았고, 그 다음 정권에서 남북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의 정부 아래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극성기를 맞았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좌파 정책’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며 가장 비열하고 모난 언어로 그를 두들겨 패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소수파 정부라는 한계와 여론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도 사형제도 없애지 못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들어 처음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됐고 보안법이 그 사나운 발톱을 숨겼다. 독립 기구로 설치된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징 차원에서나 실제 차원에서나 인권 신장의 원기소가 되었다.
그의 집권기에 내가 쓴 시사 칼럼들을 훑어보니, 그에게 호의적인 것보다 비판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비판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게 강요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뒤쪽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와 넓은 의미에서 동향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호의를(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호의라 판단된 때라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게 하고, 그의 자잘한 잘못들에까지 엄격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1987년에도, 아니 투표권이 없었던 1971년에도 이미 나는 그의 지지자였음을. 그리고 나는 또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지난 쉰 해 동안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