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명 꽃다운 목숨이 분신하거나 투신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한 1991년 4~5월 이래, 지난 한 해 반만큼 내 마음이 뒤숭숭한 적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를 5공에 비유하는 것은 과장된 선동이겠으나, 이 정부의 행태에서 1991년 봄 노태우 정부 때의 공안통치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애매한 사람들이 정부 잘못으로 죽어나가도 우익 단체들은 빨갱이 타령이고, 공안 기관은 관련자를 잡아넣기 바쁘다.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쁘다. 그때,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었다. 1991년 사태도 민주주의를 분만하기 위한 진통이라 볼 만했다. 지금은 거꾸로다. 지난 20여 년간 조금씩 자라온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고 있다. 아니, 짓밟히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지난주 이 자리에서 김종철 선생이 지적했듯, 직접민주주의의 확대가 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도를 만들고 바꾸는 것도 사람이다. 지금 정권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김종철 선생의 제안을 마이동풍으로 흘렸을 개연성이 크다.

어떤 사태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돌리는 일은 옳지 않기 십상이지만, 나는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이가 이명박 대통령이라 여긴다. 지지난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씨가 박근혜씨를 눌렀을 때, 나는 그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이 기정사실화한 마당에,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듯이 보였던) 박근혜씨보다는 비즈니스맨적 현실감각을 갖춘(듯이 보였던)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 여겼던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출범하자마자 내 생각이 틀렸음은 명확해졌다. ‘어륀지’ 에피소드를 비롯한 인수위의 온갖 소동과 인사 때마다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입에서 나온 갖가지 만담은 잊어버리자. 그 사람들이야 이명박 대통령과의 친분 때문에 공직에 진출하는(하려던) 과정에서 망신을 당한 것밖에 죄가 없다. 하긴,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어찌 그리 하나같이 ‘특별한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지만.

정작 문제는 이 대통령이다. 지난 한 해 반 동안, 나는 자연인 이명박씨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걸맞은 이인가를, 그게 아니더라도 치명적 결격 사유는 없는가를 끝없이 곱씹어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니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업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물론 정치를 경제학 모델로 설명하려는 이론가도 있긴 하지만, 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경제는 이른바 국민경제가 아니라 대기업의 생태학인 것 같다. 그가 비즈니스맨적 현실감각을 갖췄다고 여겼던 것도 착각이었다. 냉혹하고 이성적인 비즈니스맨이라면, 취임하자마자 북한 정권을 도발해 그 이후 남북 관계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통 능력에서도, 신뢰도에서도 그는 언제나 가장 아랫자리라고 여론은 말한다.

국내 문제는 꾹 참아주기로 하자. 그렇지만 그가 바깥에 나가 외국 정상이나 언론의 놀림감이 되는 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기가 힘들다. 내가 지난 대선에서 그를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그는 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사실 1980년대 전두환씨에 대해선 그런 느낌조차 없었지만, 레이건을 제 친구인 듯 착각하며 전씨가 지었던 미소에 이 대통령의 헤픈 미소가 겹치면 입 안이 소태처럼 쓰다.

이명박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기에…

그렇다고 자유선거로 뽑힌 이 정통성 있는 대통령을 내쫓을 수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해놓았다. 그가 내란이나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할 수는 없다. 아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야 할 수 있겠지만, 그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이 대통령에겐 없다. 그래서 나는 겸손하게, 정말 겸손하게 이 대통령에게 묻는다. 이 복잡한 난국을 풀기 위해 사임하실 생각은 없으시냐고. 그이 나름의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정말 잘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그 자리가 그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내 제안에 전혀 화낼 필요가 없다. 사임한 이 대통령의 자리를 한나라당 정치인이 이으리라는 것은(혹시 이회창씨여도 마찬가지지만) 내일 해가 또다시 떠오르리라는 것만큼 확실하니까.

기자명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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