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희 전문기자한나라당이 실용주의적 보수로 바뀐 것은 보수의 큰형님인 미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의 아베 정권 사례에서 보듯, 이회창씨 역시 ‘반북’을 밀어붙이려거든, ‘반미’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남북 관계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회의를 느끼곤 한다. 진보를 표방했던 정권이 반드시 남북 관계 발전에 기여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태생적으로 보수일 수밖에 없었던 정권이 더욱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필자는 월간 〈신동아〉에 실린 박철언씨의 글을 읽고 대단히 놀란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군사정권의 하수인쯤으로만 생각했던 그의 글에서, 냉전 해체의 길목에 들어선 국제정세와 우리 민족의 진로에 대한, 그 어떤 진보주의자 못지않은 통찰력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한 전문가로 이름 높았던 김남식 선생 같은 이도 생전에 “통일문제에서는 노태우 정권의 공이 대단히 크다”라고 말하곤 했다.
군인 출신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연 북방정책과 남북 관계의 돌파로를 이어받지 못하고, 다시 암흑시대로 돌린 이가 이른바 민주화의 기수를 자처했던 김영삼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정부는 정권의 성향과 정책이 일치한,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의 지난 5년을 더해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국제위기관리그룹(ICG) 동북아사무소 소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했던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피터 벡 씨는 필자에게 “노무현 정부를 왜 진보적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북 문제에서는 별로 하는 게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한 적이 있다. 필자 역시 정권 말기의 정상회담이 아니었다면 노무현 정권 5년은 남북 관계의 공백기로 기록될 만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정권의 성향과 정책 사이에는 반비례 법칙이 성립

그래서 나름으로 ‘황당한’ 지적 탐구심이 일 때도 있다. ‘정권의 성향과 실제 정책 간의 반비례 법칙에 대한 연구’, 뭐 이런 제목으로 논문을 한 편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분야는 다르지만, 학계에서 이미 그와 비슷한 탐구가 시도된 바 있다. 얼마 전 읽은 최장집 교수의 책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정통성의 취약점을 메우기 위해 중산층 보호에 열심이었던 반면, 서민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아 탄생한 그 이후의 정권들은 오히려 중산층보다는 재벌을 붙잡기 위한 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오늘날 중산층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질타하는 대목에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현실에서는 말로 떠드는 이념이 아니라, 얼마나 치열한 문제의식과 실용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남북 문제에 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필자는 이번 대선 초기에 여당 주자들이 자신과 한나라당을, 평화개혁세력 대 냉전수구세력으로 편가름하려 시도하는 것을 보며 또다시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민족 문제가 특정 이념 소유자의 전유물이 아닐지언 정, 저들은 왜 늘 말로만 ‘찜’을 하려 하는가.

이미 한나라당에서 ‘보수 꼴통’의 원조 격이던 정형근 의원이 지난 7월 신대북 정책인 ‘평화비전’을 주도했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명박 후보의 ‘비핵개방3천(북한이 비핵화를 하고 개혁개방을 하면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 공약 같은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핵문제를 핑계 삼아 지나칠 정도로 좌고우면하며 소심했던 이른바 진보 세력보다 훨씬 화끈한 면도 엿볼 수 있다.

한나라당 내 실용주의적 보수의 등장에 대해 당연히 원조 보수, 정통 보수를 표방하는 측에서는 부르르 몸을 떨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것을 빌미로 이회창씨가 대권 3수 도전을 감행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 보수의 큰형님인 미국이 북한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부시 정권 마지막 해인 내년에는 그 행보의 빠르기가  정점에 이를 것이다. 더 이상 ‘반북’만 하면 ‘친미’는 자동으로 보장되는 시대가 아니다. 이웃 일본 아베 정권의 몰락에서 보듯, 반북을 하려거든 반미를 각오하고, 친미를 선택했다면 친북을 결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원조 보수였던 정형근 의원이 실용주의로 자세로 선회한 것도 바로 미국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을 같은 원조 보수 출신인 이회창씨가 놓친 것일까. 아니면 진짜 반미를 각오하고서라도 반북 여정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나선 것일까?

그렇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남남 갈등인지 뭔지 때문에 늘 주변의 변화에 처져온 우리 형편으로 보자면,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미국의 ‘속도 위반’에 누군가 제동을 걸어줄 필요가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과연 그럴 만한 용기와 배짱이 있을까?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