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28일 〈미디어 다음〉의 ‘블로거뉴스’에 매우 생뚱맞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파업 중이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만든 ‘시사저널 거리편집국’에 올라온 ‘라이스를 평양에 데려오라우’라는 기사다. 미국 라이스 국무부장관이 오는 9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테러지원국 해제 및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를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초대국 미국 국무장관의 7∼8개월 뒤 일정을 겁도 없이 예측해놓았으니 생뚱맞게 보일 법도 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막연한 추측이나 분석이 아니었다. 라이스 국무부장관의 방북 문제가 북·미 외교 채널 간에 극비리에 논의되기 시작한 지난해 11월28∼29일 베이징 북·미 접촉과 올해 1월16∼18일 베를린 접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북·미 양국이 극비리에 합의한 올해의 하이라이트 외교 일정이었던 셈이다.

지난해 11월 베이징 접촉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느닷없이 라이스의 방북 가능성을 제기해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 올해 1월 열린 베를린 회담은 이 문제에 대한 평양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라이스 장관은 평양에 올 생각이 있는가, 온다면 언제 올 것인가. 평양 지도부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약간의 밀고 당기기가 벌어졌다. 힐 차관보는 ‘조건이 맞으면 가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는 확고하다’며 라이스의 뜻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올해(2007년)는 힘들고 내년(2008년)에 갔으면 한다”라는 그녀의 의사를 전하며 북측의 애를 태웠다. 김계관은 필사적이었다. “올해가 조선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겹친 해”라며 올해 안 방북을 완강히 고집했다. 그런 밀고 당기기 끝에 합의된 시점이 바로 9월이었던 것이다.

베를린 회담에서 라이스 방북 합의

이같은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라이스 장관이 9월 평양에 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는 사실, 기자가 2월 초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해 먼저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을 다시 〈미디어 다음〉 ‘블로거 뉴스’에 게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2월 초 방송이 나간 후 이 문제를 둘러싸고 파장이 커지면서, 몇몇 언론에 엉뚱한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다. 라이스가 5월에 방북할 가능성이 있으며, 6월 중이라도 남·북·미 3국 정상이 모여 ‘종전 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11월18일 하노이에서 열렸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을 종식하는 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을 고무시켰다. 그 뒤 평화협정은 어렵더라도 종전 선언은 이번 정권 임기 중에 가능한 게 아니냐는 희망이 ‘정책화’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미국 국무부장관의 스케줄이 그에 따라 요동쳤던 것이다. 따라서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니, 엉뚱한 데 힘을 소모하지 말자는 뜻에서 기사를 썼던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노력도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9월7일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종전 선언 및 평화 협정 문제에 집착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외교적이고 립 서비스에 불과한 언급에 또다시 ‘필’이 꽂혀, 기자회견 과정에서 이를 반복해서 다그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또한 평화체제 문제를 10월 남북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겠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종전·평협’은 지금 논의할 일 아니다

그러나 정작 평화체제의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 처지에서 보자면, 이 문제는 지금 본격적으로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 일의 순서상 한참 뒤의 문제이다. 올해 초 베를린에서 라이스 방북 일정을 합의할 때도 그랬고, 약 8개월이 지난 최근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다.

9월1∼2일 제네바에서 있었던 힐-김계관 회담 내용을 살펴보자. 이 회담에서 북한의 핵 불능화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가 상호 맞교환됐다는 얘기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의 제네바 회담은 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시작된 양국 간 ‘밀착 회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 회담의 핵심 주제 역시 라이스 장관의 방북 문제였다. 1월의 베를린 회담에서 9월이라고 합의한 이후 상황 변화로 인해 다시 조율할 필요가 생겼다.

ⓒAP Photo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부장관(왼쪽)을 김정일 위원장이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다.
우선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를 들 수 있다. 원래 스케줄로는 3월 중 끝나게 되어 있었는데, 한 달 이상을 질질 끌면서 6월까지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 여파로 4월이나 5월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던 힐 차관보의 방북이 6월에 가서야 이뤄졌다. 그리고 6월의 힐 차관보 방북에서도 ‘서로의 미래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가 참 많이 진행됐다’고 하면서도, 정작 핵심 문제인 라이스 장관 방북 논의는 난항이었다. 힐 차관보는 라이스 장관이 평양에 가기 전에 북한이 먼저 핵시설 불능화 조처를 취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북측은 미국을 어떻게 믿고 선행조처를 취하느냐고 맞섰다. 결국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딱 부러진 결론을 내지 못한 회담이 되고 만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뭔가 미국을 압박할 필요가 생겼다. 바로 이때 남북 정상회담 카드가 그럴듯하게 등장한다. 지난해 10월께부터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여러 갈래의 움직임이 있었다. 올해 5월께에는 그동안의 민간 채널 및 정치인 수준에서 진행돼온 대북 접촉 창구를 국정원으로 단일화했다. 5월부터 본격화된 국정원의 정상회담 추진에 대해 북한은 7월 초까지도 묵묵부답이었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비관론이 돌았다. 그런데 7월 말이 되자 갑자기 ‘평양발 중대 제안’이 이뤄져, 8월 정상회담 합의하기에 이른다.

지난 9월 초 평양을 다녀온 재미 정치학자에게 북한의 조평통 고위 인사는 ‘남북 정상회담은 미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속도를 재촉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진하는 것’이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정상회담 카드 하나로 중국을 압박해 10월 말 11월 초의 북·중 정상회담의 협상력을 높이고, 다시 이를 통해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식으로 게임 구도를 짜는 것이야말로 김정일 위원장의 주특기에 속한다.

9월의 제네바 회담은 바로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 이제는 미국이 뭔가 내놓아야 할 상황이었고 그 기대에 부응했다. 우선 우여곡절이 많았던 라이스 방북 시기를 10월 중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9월19일께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한 핵 불능화 로드맵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9월 하순까지는 6자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해 분위기를 잡은 후 그 여세를 몰아 평양에 들어간다는 시나리오다.

미국측은 원래 프로그램대로 9월에, 즉 10월의 남북 정상회담 전에 라이스 장관이 평양에 먼저 가는 방안에 대해서도 깊이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스케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일단 10월 중순을 전후한 시기로 잡았다고 한다. 늦어도 김 위원장의 방중 및 북·중 정상회담보다는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올해 초 설정했던 라이스의 평양 방문 목적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혹시라도 종전이나 평화협정 등을 새롭게 의제로 추가한 흔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런 기대는 북·미 관계에 대한 ‘교과서적 인식’의 부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이 국교를 맺으면서 단계를 건너뛴 사례가 별로 없을뿐더러, 김정일 위원장이 바라는 것도 그게 아니다.

제네바 회담에서 북·미 관계 격상

김 위원장은 왜 그토록 라이스 장관의 방북을 희망해왔나. 그것은 바로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 방북 이후 끊어진 북·미 관계의 선로를 다시 잇기 위해서이다. 즉, 라이스의 방북은 북·미 간에 중단된 외교 관계 정상화의 일정을 재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 외교 관계 정상화의 첫 출발은 역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상호간 연락사무소의 개설 문제이다.

그런데 연락사무소와 관련해서는 제네바 회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영사기능만을 담당하는 연락사무소 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외교 기능까지 갖춘 상주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미 평양이나 워싱턴에 양측의 대표부를 개설하는 문제는 상당한 논의가 진전되었기 때문에 결정만 나면 올해 안, 늦어도 내년 4월까지는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올해 안에 워싱턴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평양에 성조기가 나부끼는 한반도의 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9월의 제네바 회담에서는 또한 올해 가을부터 내년 가을까지 북·미 관계의 로드맵과 청사진에 양측이 의견을 같이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워싱턴 일각에서 거론하는, 이른바 ‘가을 프로젝트(Fall Project)’이다. 즉, 올해(2007년) 가을에는 라이스가 평양에 가서 테러지원국 해제와 대표부 개설 문제를 매듭지음으로써 외교 관계 정상화에 시동을 걸고, 내년(2008년) 가을에는 부시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함으로써 북·미 관계 정상화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것이다.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은 바로 내년 가을 부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때 들고 갈 ‘피날레 이벤트’인 것이다. 아직 조건과 단계가 성숙하지도 않았는데 미국이 왜 그것을 흘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규명해봐야겠지만, 임기 말 자신의 치적을 화려하게 장식할 독점 사업을 부시 대통령이 섣부르게 남과 같이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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