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제공동원호 피랍 사건과 마부노 호 피랍 사건은 놀랍도록 닮았다.

165일째다. 지난 5월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 해상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된 마부노 호 선원들이 10월26일 현재까지도 풀려나지 않고 있다. 케냐 몸바사 항구를 떠나 예멘으로 가던 마부노 호 선박 2척(1호, 2호)은 출항 4일 뒤인 15일 쾌속정을 타고 쫓아온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됐다. 이 배에는 한국인 4명과 중국 조선족 동포 10명이 타고 있었다. 한석호 선장(40), 이성렬 총기관감독(47), 조문갑 1호기관장(54), 양칠태 2호기관장(55) 등이다. 피랍 이후 협상이 계속되었지만 선주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석방되지 않고 있다.

이번 마부노 호 피랍 사건은 여러 모로 2006년 동원호 피랍 사건과 닮아 있다. 2006년 4월4일 납치된 동원호 선원들은 117일 만인 2006년 9월26일에야 무사히 풀려났다. 두 선박 납치 사건은 같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같은 해적들에게 납치됐다는 점이 닮았다. 피해자 쪽 사정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기구한 것은 동원호 사건 때 납치되었던 한 선원의 형이 이번 마부노 호 피랍 선원에 끼어 있다는 점이다.

억세게 운이 없는 이 형제는 김홍만·김홍길 씨다. 동생 김홍길씨(44)는 중국 지린성 둔화시에 두 딸을 둔 아버지다. 홍길씨는 동원호 납치 사건 이후 2006년 9월 MBC 시사프로그램 〈PD수첩〉에 출연해 피랍 후유증을 앓는 모습을 보여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지난해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신 동원호 피랍 기간에 썼던 비밀 일지를 모아 책을 냈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북하우스, 김영미 공저)이다.

그런 김홍길씨가 지금 케냐에 있다. 두 형제는 동원호 사고를 겪었는데도 다시 동아프리카에서 원양어선 조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7년 1월부터 콩고에서 일했던 김씨 형제는 올해 4월께부터 소말리아 이웃 나라인 케냐로 옮겼다. 얄궂게도 운명은 소말리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영미 제공동원호 선원으로 해적들에게 납치됐던 김홍길씨의 형 김홍남씨가 마부노 호에 탔다 납치당했다. 동원호 조업 허가증을 얻어주었던 사람은 마부노 호 선주였다.

김홍길씨는 5월11일 마부노 호가 출항하기 전날 형과 같이 숙소에서 잤다. 홍길씨는 전화 통화에서 “형도 나처럼 그런 일을 당할 줄은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 왜 위험한 아프리카 어선 조업을 계속하느냐는 질문에 “어쩌겠냐. 딸을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라고 대답했다.

피랍 선원들, 석방 이후에도 원양어선 못 떠나

동원호 사건과 마부노 호 사건에 겹치는 인물이 또 있다. 마부노 호 선주 안현수씨다. 마부노 호는 서류상 탄자니아 준자치 지역인 잔지바르 선적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인들이 관리하는 배다.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김종규 사장(마부노 호가 속한 원양업체 대표)은 “해적과의 몸값 협상은 안현수 선주가 도맡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안현수씨는 바로 2006년 동원호 사건 때  동원호의 소말리아 앞바다 조업 허가증을 얻었던 사람이다. 동원호 선원들에 따르면 안씨가 소말리아 과도정부로부터 조업 허가증을 얻어 동원호에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조업 허가증은 무용지물이었다. 과도정부의 통제력이 해적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적들은 ‘동원호가 불법으로 소말리아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라며 납치 구실을 내세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현수씨는 소말리아인들과 선원들 사이에 끼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케냐 몸바사 항에서 해적들과 전화 협상을 벌이는 안현수씨는 “몸값은 거의 정해졌는데 돈이 없어서 선원들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몸값은 마부노 호 두 척을 합쳐 110만 달러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안현수 선주는 “그보다는 낮아졌다. 정확한 액수는 공개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처음 해적들이 500만 달러를 제시했던 것에 비하면 몸값이 상당히 낮아진 셈이다. 동원호의 경우는 한 척에 88만 달러를 주고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안씨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을 해적들도 안 듯하다.
 

 

마부노 호 선원들을 납치한 해적은 동원호 해적 납치단과 같은 세력이다. 지난해 동원호를 납치할 때 행동대장이었던 그레그(가라드라고도 불림)는 그 뒤 해적단 두목이 되어 마부노 호를 납치했다. 안현수씨에 따르면 그레그 혹은 가라드(Garaad)는 30대 초반으로 소말리아 북동부 푼틀랜드 출신이라고 한다. 그레그 외에도 부하 해적 역시 동원호 납치단과 겹친다. 심지어 안현수씨의 협상 통역을 맡고 있는 압둘라 역시 동원호 납치 때 영어 통역을 했던 사람이다. 가해자 해적단과 피해자 선원 형제가 불행한 재회를 한 셈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겹치는 상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우연치고는 너무 기막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혹시 한국 선원들을 고의적으로 노리고 납치한 것 아니냐는 얘기다. 하지만 케냐 현지 한인들은 이를 부정했다. 해적들이 납치한 배가 마부노 호뿐만 아니라 타이완 선박도 있고 최근에는 브라질 선박도 추가로 납치했다.

선박 회사 측은 동원호 사건을 계기로 나름의 안전 조처를 했다고 주장한다. 마부노 호는 예맨으로 가면서 소말리아 해안으로부터 약 260~330km 떨어진 해로를 택했다고 한다. 이 정도 거리면 소말리아 해역이라고 볼 수도 없는 공해다. 하지만 요즘 소말리아 해적들은 600km 밖까지 진출해 선박을 낚아채고 있다.

납치와 험한 상황에도 원양어선 선원들은 지독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동원호 피랍 선원 가운데 다시 배를 탄 사람이 김홍길씨 뿐만은 아니다. 항해사였던 김진국씨도 그렇다. 김홍길씨가 쓴 책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는 ‘김진국씨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 결심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취재 결과 김진국씨는 올해 6월부터 부산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전 4월까지는 피랍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동원호 회사에서 준 치료 보상금으로는 병원비를 내는 데 급급해 생활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다시 뱃일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지만 버티고 있다”라고 말했다. 동원호 선원 가운데 위신환 갑판장과 이기만 조리사, 최성식 선장 등도 모두 남태평양·피지 등에서 원양어업을 하고 있다.

샘물교회, 3000만원 기부

 

 

ⓒ김영미 제공동원호 피랍 사건 때 해적단 행동대장이었던 그레그(별칭 가라드)는 마부노 호 피랍 사건 때는 두목이 되어 있었다.

똑같은 나라에서 똑같은 해적에 똑같은 선원들이 당한 사건에 똑같은 것이 또 있다. 정부의 대응이다. 외교부는 사건 발생 이후 피랍 선원 가족들과 언론에 협상이 잘되고 있다고 말해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협상에 방해된다’며 사실상 취재를 막는 태도도 같다. 마부노 호 피랍 사건에 대해 정부가 보이는 미온적인 태도는 아프가니스탄 선교단 피랍 때 보였던 적극적인 협상 자세와 차이가 난다. 부산에 거주하는 한석호 선장의 아내 김정심씨는 “남편이 빵 한 조각만 먹고 모래사막을 걸으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잠을 이룰 수 없다. 정부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최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마부노 호납치 사건을 다룬 이후 선원들의 석방을 바라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부산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몸값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활동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전국해상산업노조연맹과 기독교 단체가 모금한 돈을 합치면  10월25일 현재 5억원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선교단이 속해 있던 샘물교회도 3000만원을 기부했다.

과거 동원호 선원들도 모금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동원호 항해사였던 김진국씨는 옛 동원호 피랍 동료들이 모여 모금 장소까지 갔다고 말했다. 그는 “피랍 생활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젊었지만 마부노 호 선원들은 50대가 넘는 분들이 많은데 걱정이다. 차라리 배와 함께 죽여달라는 그분들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전했다.

 

 

 

 

ⓒ김영미 제공동원호 사건 당시 통역을 맡았던 압둘라는 여전히 그레그 밑에서 통역으로 일한다.

김진국씨는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STD)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김씨는 “원양어선 조업 선원들의 삶 자체가 짓궂다. 한때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원양어선 선원들이 점점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해도 이 바닥을 떠날 수도 없다”라고 토로했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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