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지난 10월2일 백악관 조찬 모임에서는 때마침 베이징에서 타결된 북한 핵 합의를 추인하느냐 여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부시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부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딕 체니 부통령(66)과 스티븐 헤들리 국가안보 보좌관이 포진했다.

이 자리에서 라이스와 힐은 북핵 합의를 추인해 북한의 추가 핵 확산을 막든가 아니면 종전의 대북 고립 정책으로 회귀해 북한의 핵 확산을 방치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부시에게 주문했다. 반면 체니 부통령은 북한과 시리아 간의 핵 협력설이 불거진 상황에서 더 이상 북한을 신뢰해서는 안 되며 종전의 핵 합의도 무산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날 격론은 대북 협상파인 라이스·힐 조의 승리였다. 부시 집권 뒤 사실상 대외정책을 호령하던 천하의 체니도 적어도 북한 핵 문제만은 협상 타결 의지가 강한 부시 앞에서 맥을 못 추고 꼬리를 내린 셈이다.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체니의 입김은 예전만 못한 게 확실하다. 아니 아예 날개가 꺾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체니는 성사 직전까지 갔던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의 평양행을 파투 놓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설상가상으로 우군 격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존 볼턴 유엔대사의 지원 사격도 럼스펠드와 볼턴이 자의 반 타의 반 떠난 데다, 직속 상관인 부시 대통령이 올해 초를 계기로 대북 협상 기조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체니의 북한 관련 발언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체니의 힘이 완전히 빠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중동 문제에 관한 한 그의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특히 북한과 시리아 간의 핵 협력 의혹설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체니가 다시 외교 무대 전면에 나서고 있다. 사실 체니는 지난해 자신의 오른팔이자 비서실장인 스쿠터 리비가 이른바 중앙정보국 비밀정보요원의 신원 누설 사건에 휘말리면서 언론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주 관심사였던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도 자연히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요즘 들어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현재 그의 집중 공격 대상은 핵 개발 의혹을 받는 이란과 북한간의 핵 연계설이 나도는 시리아다.

체니는 지난 10월21일 워싱턴 소재 근동정책연구소에서 행한 연설 때 이란을 중동 평화의 걸림돌이라며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serious consequences)에 직면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통상 ‘중대한 결과’라는 외교적 완곡 어법은 전쟁도 불사할 것임을 뜻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외교적 언사로 경고할 수 있는 최강의 수사적 표현인 것이다. 이런 경고가 포함된 체니의 연설문은 당연히 백악관 최고위층의 재가를 받았다. 체니의 발언은 겨우 며칠 전 부시 대통령이 이란이 핵을 갖게 되면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발언을 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그 배경을 두고 의견이 더욱 분분하다. 대체적 관측은 체니가 이란에 포문을 연 것을 계기로 앞으로 중동 문제에 관해 적극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점이다.

체니의 초강경 발언은 그 시점이나 장소를 놓고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선 그가 연설한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는 막강한 로비 단체인 미국 이스라엘 홍보위원회(AIPAC)의 조사국장 출신이 20년 전 창설한 보수적 두뇌 집단이다. 이 로비 단체는 부시 행정부가 최근 이란의 혁명수비대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 것을 포함해 그간 이란에 대한 제재 조처를 하도록 전방위 노력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체니의 비서실장인 존 한나도 이 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보수 강경파 인사다.

체니의 강경 발언 시점·장소 ‘의미심장’

이 연구소는 부시 행정부의 대중동 정책이나 의회의 관련 입법에 관해 구체적 견해를 드러내진 않지만 친이스라엘 로비 단체 격인 미국 이스라엘 홍보위원회의 활동에 동조적이다. 또한 이 위원회의 다양한 로비에 필요한 연구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체니의 발언 시점이다. 시기적으로는 게이츠 국방부 장관이 미국의 대중동 정책에 관해 다소 절제된 발언을 한 지 1주일 만에 나온 것이고, 부시의 ‘3차 대전’ 운운으로부터 고작 며칠 뒤 나온 것이다. 부시가 대북 정책에 관해서는 체니의 발언을 자제시키면서도 중동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하도록 한 것이다.

ⓒAP Photo미국 체니 부통령(오른쪽)은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이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체니의 강성 발언을 최근 들어 부쩍 대북 강성 발언을 쏟아내며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존 볼턴 전 유엔대사의 행보와 연계해 보기도 한다. 헤리티지 재단과 함께 보수주의 연구소로 이름이 자자한 미국 기업연구소(AEI)에 적을 두고 있던 볼턴을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의 반대도 무시한 채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으로 발탁한 인물이 바로 체니였다. 체니나 볼턴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부시 행정부 출범 후 각광을 받아온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선봉장이다. 지금은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에 비해 위세가 많이 꺾이긴 했어도 아직도 이들은 중동 문제에 관한 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최근 중동의 ‘악의 축’으로 꼽히는 시리아와 북한 간 핵 협력설이 대서특필되면서 체니를 정점으로 한 네오콘은 때를 만난 듯 전면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의 독설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모린 다우드는 10월24일자 칼럼에서 “체니 같은 강경파들이 흡사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부시 대통령이 경고한 3차 세계대전이 발발이라도 할 것처럼 이란에 대한 선전포고를 더욱 부추키고 있다”며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체니가 현재 중동을 상대로 가히 ‘광기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체니의 발언을 곱씹어보면 만일 이란이 핵을 무장하는 순간 미국이 이라크처럼 군사 공격을 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부시가 언급한 ‘3차 대전설’이 그냥 나온 발언이 아닌 것이다.

또다시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된 체니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극과 극이다.  보수파 사이에서 체니는 인기가 높다. 그의 끊임없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극우파 보수 인사들은 지금도 그를 대선 후보로 밀 정도다. 그러나 민주당을 포함한 범진보 진영에 체니는 백해무익한 극우파의 영수로 낙인찍힌지 오래다. 심지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11일 MSNBC TV에 출연해 체니는 나라의 ‘재앙’이자 대외정책 수립에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호전주의자’라고 맹비난했을 정도다.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오만과 일방주의로 점철돼온 미국의 실패한 대외정책에 누구보다도 체니 자신이 깊숙이 관여해왔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중동 문제를 기화로 체니가 또다시 보수 강경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데 대해 불길한 예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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