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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샌더스 의원(왼쪽 세 번째)을 만난 미국의 한인 풀뿌리 활동가들(위). 7월13일 한인 풀뿌리 활동가 600여 명이 워싱턴에 모였다.

미국 민주당 전국 서열 3위 조지프 크롤리 의원이 지난 6월26일 뉴욕 주 당내 예비 경선에서 탈락했다. 뉴욕 시 슬럼가로 소문난 브롱스에서 빈민 유권자 활동을 한 28세 남미계 여성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에게 패했다. 〈뉴욕타임스〉는 예비 경선 하루 전날 11선에 도전하는 크롤리가 차기 하원의장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뉴욕타임스〉가 헛발질을 할 정도로 미국 정치권의 최대 이변이었다.

크롤리의 예선 탈락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20대 여성이 50대 남성을 이겼다, 남미계가 백인을 이겼다, 10만 달러 선거자금으로 300만 달러를 쓴 경쟁 후보를 녹다운시켰다 등등. 코르테스는 2016년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후보의 자원봉사를 한 경력이 전부다. 그와 풀뿌리 활동가들은 유권자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민심을 파고들었다. 반면 크롤리는 늘 해오던 방식대로 지역 유지들의 돈과 조직에 기댔다.


당락을 가른 건 풀뿌리 바람이었다. 이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 미국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선거판은 풀뿌리 바람이 거셌다. 중간선거 전에 흐름을 형성한 풀뿌리 바람은 대선이 가까워지면 폭풍으로, 대선 때는 순식간에 광풍으로 변했다. 2008년 오바마 바람이 그랬고, 2016년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바람이 그랬다. 미국 정치의 키워드는 풀뿌리다.

미국 전역의 한인 유권자들도 풀뿌리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7월12~14일(현지 시각) 한인 풀뿌리 활동가 600여 명이 워싱턴에 집결했다. 2박3일간 ‘한반도의 평화’란 주제로 한인풀뿌리대회(KAGC: 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를 열었다. 한인풀뿌리대회는 연방 의원들을 타깃으로 하는 ‘시민 로비’다. 중간선거가 있는 해에 지역에서 유권자 집단이 직접 워싱턴으로 찾아왔는데, 그들을 만나지 않을 ‘용감한’ 의원은 거의 없다.

7월13일 아침 8시30분, 전국 각지에서 온 한인 600여 명이 의사당 앞에 모였다. 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상원의원과 만났다. 그는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랭킹 멤버’이다(미국 의회에서는 야당 간사를 랭킹 멤버라고 부른다). 메넨데스 의원은 현재 사실상 상원 외교위원장 구실을 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인 밥 코커 외교위원장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의 은퇴 선언으로 현재 상원 외교위원회 거의 모든 일을 메넨데스 의원이 주도하고 있다. 상원 외교위원장은 미국 외교에서 대통령과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자리다. 한인 풀뿌리 활동가들과 메넨데스 의원의 만남이 알려지자,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취재에 나서기도 했다. 한인들은 그에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메시지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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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상원의원(가운데)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의원들 만나 트럼프 대북정책 지지 요청

한인 600여 명은 20여 개 조로 나뉘어 자기 지역 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한인풀뿌리대회 명찰을 달고 로비 가방을 메고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의원실을 찾았다. 매년 7월 개최되는 한인풀뿌리대회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 바로 이 의원실 방문이다. 물론 3~4개월 전부터 한인풀뿌리대회 본부에서 미리 의원실과 접촉해 일정을 잡고, 만남 때 요구할 현안도 책자로 보내는 등 사전 준비를 한다.

한인풀뿌리대회 참가자들은 버니 샌더스, 코리 부커, 테드 크루즈, 에드워드 마키 의원 등을 만났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찰스 슈머 의원도 접촉했다. 참가자들은 전략적으로 한반도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하원 외교위원회의 위원장과 아태소위원회의 중진 의원들을 주로 만났다. 참가자들은 의원들에게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서명한 공동성명을 한인들도 지지한다고 호소했다.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의원들을 설득했다. “미국 시민들에게 향하는 북한의 핵 위협을 제거하고, 전쟁을 막으며, 경제를 살리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는 기회일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시민 로비가 당장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해야 의원들도 반응하고 움직인다. 실제로 참가자들이 만난 민주당 소속 한 의원은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은 좋다. 나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그것을 찬성하면 트럼프 지지로 해석된다. 내가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그래서 나는 현시점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트럼프식 관계 개선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 벽뿐 아니라 한인들 내부 사이 벽도 두껍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초강경 일변도였다. 게다가 미국 한인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대북 강경 노선을 유지하도록 의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의원들은 미주 한인들이 모두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줄 알고 있다.

참가자들은 온종일 의사당을 누비면서 100여 명의 의원을 직접 만났다. 그날 저녁, 의사당 옆 호텔에서 열린 만찬 때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을 비롯해 연방 의원 20여 명이 참석했다. 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 미국 대사는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조윤제 주미 한국 대사는 참석해 연설을 했다. 현직 연방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한인 유권자들의 만찬 테이블에서 차례로 연설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 냉소적이고 부정적이었던 의원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한인풀뿌리대회는 올해 주제를 잡았다. 정상끼리의 만남은 양해각서(MOU) 수준이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구체적 로드맵은 워싱턴 의회가 만들어야 한다. 의회가 인준을 해야 풀리는 법적인 문제가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할 의지까지는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올해 한인풀뿌리대회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주제로 삼았다. 전국의 한인 유권자가 워싱턴으로 직접 의원을 찾아와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제 각 의원들이 어떻게 챙기는지 감독하고 감시해서 지역구 선거에 반영을 할 것이다. 이것이 유권자의 방식이고 풀뿌리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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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풀뿌리대회 모습.

젊은 한인들의 참여 열기

2005년 한·미 간 비자 면제 프로그램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한인들이 시민 로비를 벌였다. 그 일을 성사시킨 한인 풀뿌리 활동가들은 곧장 연방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힘을 모았다. 마침내 2007년 7월30일 일본의 저지 로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연방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일을 주도한 시민참여센터는 전국에서 이 일에 동참한 각 지역의 핵심 인사들을 조직했다. 2014년 이 인사들을 주축으로 제1회 한인풀뿌리대회(KAGC)를 열었다. 자기 지역구 의원의 워싱턴 사무실을 방문해서 한인 사회의 이슈를 전달했다. 지역구의 유권자가 워싱턴까지 찾아와 요구안을 자료집으로 만들어 전달하자 의원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후 매년 참가 인원이 늘고 있으며 올해 5회를 맞았다. 의사당 안에서 한인풀뿌리대회는 ‘유권자가 주도하는 풀뿌리 조직’으로 소문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민사회가 조직적·전문적으로 시민 로비를 펼치는 사례는 유태계가 유일했다.

한인풀뿌리대회는 중앙과 지역에서 함께 진행된다. 지역에선 유권자를 조직하고, 워싱턴에 와서는 현안을 설명하고 이를 관철한다. ‘Local Action, Washington Impact’가 바로 한인 풀뿌리 조직의 활동 방식이다. 한인풀뿌리대회에는 첫해인 2014년 150여 명이, 5회째인 올해 6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민 1세대 300여 명, 2세대 대학생 250여 명,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여했다. 우리로서는 젊은 세대의 참여 증가에 놀라워하고 있다.


로비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여기지만 워싱턴에서는 하나의 산업으로 형성되어 있다. 연방법에 등록된 직업 로비스트들은 영리 목적으로 현안을 의원들에게 전달한다. 한인풀뿌리대회처럼 공공이익을 위한 시민 로비는 현직 의원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직업 로비스트보다 자발적이고 더 열정적이다. 더구나 전국에 있는 한인들을 조직해서 동원하기 때문에 다수의 연방 의원을 상대로 효과적인 로비를 펼칠 수 있다. 

기자명 워싱턴·김동석 (미국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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