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의 미래’라는 말을 들었다. 한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서였다. 데뷔 20년을 맞은 가수의 공연도 공연이었지만, 1부와 2부 사이에 초대 가수로 출연한 사람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싱어송라이터 ‘유라(youra)’였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존재를 널리 알린 가수의 무대에 선 이 ‘무명 가수’는 시간에 쫓기듯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자신을 소개한 후에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으레 그러하듯 그 시간을 화장실에 다녀올 때로 여긴 이들이었다. 적지 않은 인원이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다 민망했으나 무대 위에 선 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에 집중했다. 좁은 보폭으로 무대를 누비며 노래하고 춤추는 이의 모습이 근사했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세 곡을 요란스럽지 않게 연이어 부른 후에 그가 미소 띠며 말했다. “화장실 가신 분들이 얼른 들어오셔야 할 텐데요.” 나도 웃음이 나왔다. 최선을 다했구나. 노래 세 곡을 부르는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이해시킨 이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그 얼굴에는 어떤 주눅이나 좌절이나 비극이 들어서 있지 않았다. 비록 잠시일지언정 연습한 바대로 노래한 사람의 얼굴에 번진 기쁨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목격하는 담대함이었다.
 

ⓒ시사IN 신선영7월14일 2018 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초대 가수가 퇴장하고 다시 무대에 오른 가수가 그에게 감사를 전하며 관객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미래입니다. 지켜봐주세요.” 문득 ‘미래’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미래의 형태와 내용에 관한 것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무엇을 비추는 거울일까. 그날 오후에 광장에서 보았던 이들의 얼굴도 함께 그려졌다. 미래는 기쁨에, 연습에, 담담한 것에 가까운 것일 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년 가수 생활을 회상하는 소감 대신 현재를 곱씹다가 ‘○○할 수 있다면’이라는 노랫말로 콘서트를 담담히 닫던 이와 “언젠가 나올 제 데뷔 앨범에 수록될 노래입니다”라며 마지막 곡을 옹알옹알 소개하던 이의 모습을 겹쳐보면서 가능성의 언어를 자주 쓰는 이들이 서는 ‘미래의 자리’에 관해 생각했다. 미래의 자리는 어딘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일 것이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그 자리는 넓거나 좁은 자리가 아니라,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나의 자리다. 열린다면, 언젠가, 라는 무한한 자리.

무지개 망토를 두르고 노는 이들을 보며

한 사람을 무엇이든 가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자리를 우리는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공연에 오기 전, 나는 한 번도 참가해본 적이 없다는 친구와 함께 퀴어문화축제를 찾았다. 우리는 어디에나 함께 있다는 구호로 시작된 ‘열아홉 번째 현장’에 서 있자니 자연히 지나온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인간이 되었다. 나와 친구는, 당당히 그곳을 찾아와 무지개 망토를 두르고 노는 젊은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아, 미래다. 밝은 미래다’라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나라들의 국기로 만든 ‘암스테르담 레인보우 드레스’ 곁에 서서 ‘셀카’를 찍는 이들을 보며 그들이 인증하고 있는 것은 혐오의 깃발일까, 현재의 얼굴일까, 미래의 무지개일까 헤아려보았다. 나는 그날 저녁 듣게 될 말보다 먼저 그 자리에서, 내가 선 곳에서 우리의 미래에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던 것도 같다. 이번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은 ‘퀴어라운드(Queeround)’였고, 한 가수의 콘서트에 붙은 이름은
‘더 원더(The Wonder)’였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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