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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의 밀사’ 이준

이준은 ‘헤이그의 밀사’로 잘 알려져 있다. 헤이그로 가기 전의 이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웠던 법률의 수호자였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8월 02일 목요일 제5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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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팔도 가운데 함경도 사람들은 상시적인 외침(外侵), 그리고 중앙정부의 노골적인 차별과 착취를 당하며 살아야 했던 만큼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유명해. 기후도 혹독했지. 함경남도 북청 사람들은 ‘덤비 북청’이라는 별명이 있었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빈다고 해서 나온 말이야.

1859년 1월, 이 사연 많은 함경도 북청에서 조선 태조의 사촌이자 고려 말의 몇 안 되는 충신이었던 이원계의 후손으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초명은 이성재(선재라고도 한다), 후일 이름을 ‘준(儁)’으로 바꿔 ‘이준’이라 불리게 되는 사람이야. 이준 하니 떠오르는 도시가 있지? 네덜란드의 헤이그. 그래, 헤이그의 밀사 이준이 맞아. 오늘은 밀사 이전 이준의 삶에 대해 더듬어보려 해.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준은 ‘덤비 기질’ 충실한 북청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이준이 얼마나 그 피가 뜨겁고 북청 사람다웠는가를 증언하는 일화 하나. 열두 살 난 이준은 북청 향시에 응시했는데 좋은 성적을 얻고도 급제하지 못했어. 그러자 그는 북청성 남문 문루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해.

당시 조선에서 함경도 북청의 전주 이씨란 출세와는 거리가 먼 출신 성분이었어. 함경도 자체가 오랑캐들과 인접하여 ‘선비가 살 만한 땅이 아니라’는 그릇된 인식이 팽배했고, 어쩌다 함경도 과거 급제에 웬만큼 출세한 이가 나오면 ‘파천황(破天荒)’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지. 그래도 꿈 많은 소년 이준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 일설에 따르면 이때 대원군과도 만났고 대원군의 소개로 형조판서 김병시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고 해. 그러던 어느 날, 담뱃대 문제로 김병시의 아들이 시비를 걸었다는구나. “너 같은 상민은 그런 장죽을 쓰는 게 아니다.” 그러자 이준은 완연한 ‘덤비’ 기질을 발휘했어. 담뱃대를 작신 부러뜨리며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 담뱃대가 사람 위에 있음둥?” 일갈해버리고 말았지.  

이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어. 함흥 순릉 참봉에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다시 상경해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 양성소에 들어갔지. 1896년 검사시보에 임명되지만 얼마 못 가고 말았단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그 역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기 때문이야.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그는 이후 독립협회 활동에도 참여해 만민공동회를 주도했어.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무산시킨 보안회 활동에도 열심이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기도 했어. 친일파라는 오해를 살 만큼 열렬한 개화파였던 이준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에 대한 배신감에 몸을 떨며 을사늑약 반대 운동과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했어. 그렇게 세상과 ‘덤비’ 하던 이준은 1906년 그에게 가장 걸맞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맡게 돼. 평리원 검사, 요즘의 검사와 이름도 직분도 같은 관직에 임명된 거야.

한때 평리원(대한제국 당시 최고법원)에 의해 기소돼 매질을 당한 ‘전과자’이기도 했던 이준 검사는 짧은 검사 생활 동안 검사가 지녀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단다. 그 한 예로 황족 이재규 토지 강탈 사건을 들 수 있어. 황족 이재규가 일본인 등과 부화뇌동하여 경기도 가평군 소재 전답의 문권과 증권을 위조해 자기 소유로 만든, 즉 황족의 지위를 이용해 토지를 빼앗은 사건이었어. 이준은 자그마치 징역 10년을 구형하여 거만하게 앉아 있던 이재규를 기겁하게 만든단다.

ⓒ연합뉴스
2017년 7월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148번지에서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이 열렸다.
법부 형사국장을 기소한 검사 이준


1907년 황태자의 가례를 맞아 고종 황제는 특사령을 내리는데 이때 이준 검사는 을사늑약 반대 운동 또는 매국노 처단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이들의 이름을 특사 명단에 끼워 넣었어. 식물 국가가 돼버린 대한제국에서 이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고, 법부(法部) 상관들은 이준이 제출한 명단에서 몇몇 이름을 지워버렸지. 그러자 이준이 발끈한다.

“김낙헌 국장님(형사국장이었다). 제가 올린 명단에서 곡산 민요(民擾) 사건 장두형 등 3명, 모살 미수 사건 김일제 등 10인 등의 이름이 왜 빠졌습니까?”

“일본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들을 풀어주는데 대신들은 얌전할까?”

“공식적으로 제출된 특사 명단을 함부로 삭제하여 위로는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배신하고 아래로는 죄수를 원통케 해서 나라에 불화를 일으켰으니, 국장님은 형법대전 제331조에 따라 처벌 또는 파면되는 죄를 저지르신 겁니다!”  

그리고 이준은 법부 형사국장을 기소해버린단다. 이에 발칵 뒤집힌 법부가 하극상을 빌미로 이준을 체포해 구속하자 이준은 끄덕도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부당한 체포를 이유로 자신의 동료 검사와 법부 관리를 또 고소했어.

을사늑약 이후 침울함에 빠져 있던 대한제국 국민들은 ‘법대로’를 외치며 을사늑약 반대 운동 혐의자들을 석방하려 들고, 그를 가로막는 법부 관리들을 고발하고 자신이 처벌을 받게 된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달려드는 돈키호테 같은 검사 이준에 열광했어. 법부는 이준의 재판 때 혹여 민중들의 폭동이 있을까 하여 일본 통감부에 경비 강화를 의뢰했는데, 이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단다. “평리원은 내일 아침 이준을 인치하여 재판 판결을 내리려고 한다. 만약 이에 대하여 또 혹시 인민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다는 취지에서 법부대신이 통감대리에게 교섭하여왔다. 통감대리는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헌병에게 다소의 경계를 강화시킬 것이다. 이준은 청년회와 자강회에 가입하여 양회 내에서 다소의 세력을 가지고 전부터 허영을 탐하는 교활한 인물이다(문준영, <이준, 지사적 삶과 검사로서의 활동>).”  

‘다소의 세력을 가지고 전부터 허영을 탐하는 교활한 인물’이라는 일본인들의 평을 뒤집으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이전부터 일본의 음모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지혜로운 인물’이라는 뜻이 되겠지. 이준은 이렇듯 일본군이 경비를 선 재판에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태형 100대면 자동으로 파직되는 것이 법이었으나 여기서 운명적인 인물이 개입한단다. 고종 황제가 태형 70대로 감해주어 검사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거야. 고종 황제는 이 강골 검사를 눈여겨본 것 같아. 고종 황제는 몸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마는, 법 앞에서라면 상관이고 대신이고 없었던 서슬 푸른 검사 이준에게 밀사의 중책을 맡겼다. 이준은 헤이그까지 가서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부르짖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돼. 국사 교과서에서는 ‘밀사’로 기억되지만 아빠는 네게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웠던’ 법률의 수호자로서 이준의 면모도 함께 기억하라고 얘기하고 싶구나. 여러모로 그는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드문 인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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