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그림책이 두 종류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적인 이야기 그림책입니다. 이야기를 먼저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서 만든 그림책입니다. 글과 그림의 이야기가 똑같기 때문에 그림을 보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옵션인 동화책인 셈입니다. 또 하나는 현대적인 그림책입니다. 그림이 이야기를 주도합니다. 때로는 글과 그림이 대화를 하고, 때로는 글이 그림처럼 그려지기도 합니다. 글이 하나도 없는 그림책도 있습니다. 현대적인 그림책은 그림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짜 그림책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그림책이든 현대적인 그림책이든 독자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느냐가 성공의 관건이겠지요.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는 전통적인 이야기 그림책입니다. 신시아 라일런트의 글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그림이 딱히 현대적이거나 개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캐스린 브라운은 전통적인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림이 어떻게 이 책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신시아 라일런트 글, 캐스린 브라운 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펴냄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자동차에게 베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의자에게는 프레드라는 이름을, 침대에게는 로잰느라는 이름을, 그리고 집에게는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할머니는 로잰느에서 일어나, 프레드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고, 베치를 타고 우체국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편지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모두 숨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할머니에게는 다정하게 이름을 부를 친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기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것들에게만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의자· 침대·집. 할머니는 그들보다 오래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할머니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갈색 강아지는 무척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햄 한 덩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강아지는 매일 할머니를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보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사람 얼굴을 그려 넣은 이유

평범해 보이는 캐스린 브라운의 그림이 이 그림책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시아 라일런트의 글을 읽는 동안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주인공 둘이 보입니다. 바로 할머니와 갈색 강아지입니다.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는 자기보다 오래 사는 물건에게만 이름을 지어주던 할머니가 어떻게 갈색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림에 신경이 쓰입니다. 주인공 할머니와 갈색 강아지가 아니라 자동차 베치, 의자 프레드, 침대 로잰느, 집 프랭클린에 자꾸만 신경이 쓰입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베치, 프레드, 로잰느 그리고 프랭클린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 작가 캐스린 브라운은 사물에 사람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을 가진 자동차·의자·침대·집이 이름 없는 할머니와 갈색 강아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게 두렵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먼저 떠나는 게 두려워서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기자명 이루리 (작가∙북극곰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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