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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헌공’ 보기가 부끄럽지 않을까

어느 시대에나 대의에 목숨을 걸고 ‘권력자든 백성이든 지켜야 할 도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려 시대의 ‘영헌공’ 김지대는 절대 권력자 아들의 횡포에 법과 도리를 내세워 맞섰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7월 17일 화요일 제5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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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는 권력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 “권력이란 타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이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권력을 쥔 자는 ‘타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했지. 우리 역사에도 그런 권력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누구일까? 아빠는 우리 역사 최강의 권력자 중 하나로 최이(崔怡)가 떠오른다. 고려 최씨 무인 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고려 무신 정권 시대를 통틀어 최장기 권력자이며(무려 30년) 몽골의 침략으로 온 국토가 쑥밭이 되는 상황에서도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다가 편안하게 눈감은 사람이지.

대개 고려 사람들은 이 극강의 권력자 앞에서 혹여 그 비위를 거스를까, 혹시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았을 것 같구나. 어느 시대에나 대의(大義)에 목숨을 걸고 권력자든 백성이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설파하는 사람들은 있었지.

ⓒ수암풍수지리연구소
경북 청도군 청도읍 대현상동 금릉곡에 있는 ‘영헌공’ 김지대의 묘소.
최이에게는 정실 아들이 없었고 만종과 만전이라는 서자를 둘 두었어. 그 어머니 쪽 신분이 워낙 천해서 그랬는지 최이는 처음에는 사위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했고 서자 둘은 머리를 깎아 승려로 보내버렸어. 만종은 경상도 진주 단속사, 만전은 전라도 화순 쌍봉사에 똬리를 틀고는 승려는커녕 천하의 망나니만도 못한 탐욕을 부리기 시작했어. 경상도에서 비축해둔 쌀 50여만 석을 빼돌려 곤궁한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 쳐서 받는 ‘장사’를 했는데, 가을만 되면 이 머리 깎은 두 아귀의 부하들이 하도 기세등등하게 다니는 통에 사람들이 이쪽에 곡식을 바치느라 나라에 낼 세곡이 부족할 지경이었어. 어디 그뿐이랴.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최만종과 최만전의 부하들은 부녀자들을 성폭행하거나 나랏일에 써야 할 역마를 타고 다니며 지방관들을 발아래로 깔보고 다녔지.  

보다 못한 형부상서(법무부 장관 격이지) 박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최이에게 두 아들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그 부하들을 처벌할 것을 권해. 최이도 처음에는 개경으로 두 아들을 소환하고 빨아들인 재물을 다 몰수하라 호령했는데 막상 아들들이 울며불며 부인하자 이 권력자는 금세 핏줄 쪽으로 기울어버렸어. “박훤과 송국첨을 귀양 보내라.” 하지만 이렇듯 절대 권력자의 아들 만종과 만전의 횡포에 법과 도리를 내세워 항거한 사람은 또 있었어. 김지대(金之岱)라는 사람이야.  

ⓒ시사IN 윤무영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위)이 재임 시절 일어난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고려 고종 4년(1217)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최이의 아버지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해에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했고 고려 조정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했지. 원수 조충은 군대를 사열하던 중에 색다른 병사 하나를 발견해. 대개 병사들은 방패에 기괴한 동물이나 도깨비를 그려 넣었는데 그 병사는 다음과 같은 한시를 방패에 적어놓았지. “나라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해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 조충은 이 범상치 않은 병사를 눈여겨봐 두었다가 이후 과거 시험에 응시한 그를 일등으로 뽑았어.  

‘권력자’ 최만전의 수족에게 죄를 묻다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강호(强豪)들을 억눌렀으며, 적발하는 것이 귀신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김지대는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도 안찰사로 부임해. 그 무렵 전라도 남쪽 섬 진도에는 후일 최이의 둘째 아들로 권력을 승계하게 되는 최만전(후일의 최항)이 버티고 있었어. 그와 그 졸개들은 인근 고을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횡포가 말이 아니었지. 그 앞잡이로 통지(通知)라는 이가 특히 악명이 높았어.

하루는 김지대가 직접 최만전이 있는 절에 갔는데 최만전은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어. 김지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겠지. 주인이 맞아주지 않는 손님만큼 민망한 존재는 없지. 하지만 김지대는 마루에 주저앉는단다. 피리를 잘 불었다는 김지대는 피리를 처연하게, 때로 비장하게 불어젖히면서 시간을 보냈어. 일종의 시위였어. “안찰사 김지대 여기 있소” 하는.  

후일 형을 제치고 권력을 차지하는 최만전은 생판 무뢰한은 아니었던 듯해. 짐짓 “몸이 아파서 오신 걸 몰랐소”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지. 최만전이 이런저런 부탁을 하자 일단 김지대는 들어주는 듯하면서 이런 말을 해. “행영(行營:안찰사의 주재 관청)에 가야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통지라는 자를 보내십시오.”

며칠 뒤 최만전의 명을 받은 통지가 의기양양 사기충천해서 김지대를 찾아가. 김지대는 최만전의 부탁을 전하려는 통지를 가로막고 차근차근 그 죄를 묻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태연했지만 자신의 악행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통지의 낯빛이 변해갔지. “아무개 고을에서 여인 몇을 강간한 죄” “아무개 고을 아무개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쳐 죽인 죄”. 마침내 김지대가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려. “저놈을 묶어서 강물에 던져버려라.”

물론 너는 최만전을 그렇게 죽여버리지 못하고 기껏 종놈을 단죄한 게 무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아들 최만전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김지대가 통지를 죽여버린 건 최만전의 머리를 몽둥이로 친 것 이상의 충격을 던지는 일이었어. 생각해보렴. 통지가 그렇게 죽었다면 전처럼 최만전의 똘마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기가 쉬웠을까? 권력자에게 밉보이면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가문의 몰락도 드물지 않던 시대, 김지대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절대 권력에 법으로 맞선 거고, 권력의 말단일망정 권력자의 수족을 자름으로써 정의를 구현했던 거야.  

후일 권력자 최항으로 거듭난 최만전은 뒤끝이 매서운 사람이었어. 아버지에게 자신을 고발했던 박훤을 기어코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고, 지방을 전전하던 송국첨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지. 그런 최항도 김지대만은 손대지 못했어. “김지대가 청렴하고 조심하는 데다 허물이 적었으므로(<고려사> 김지대 열전).” 최항에게는 “해묵은 감정이 있었다”고 분명히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이 사람을 해칠 구실을 찾지 못했던 거야.

김지대는 최씨 정권의 몰락과 몽골에의 항복, 개경 천도 등 파란 많은 역사를 지켜보고 나서야 세상을 떴어. 그에게 바쳐진 시호는 영헌공(英憲公). “덕이 바르고 화합함(和)에 호응(應)하는 것을 영(英)이라 이르고, 행실이 착하여 기강(紀綱)이 됨을 헌(憲)이라 한다”라는 것이 이 시호의 의미이니 당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그로부터 800년쯤 뒤로 타임 점프를 해보자. 한 나라의 기강을 책임져야 할 사법부를 통째로 행정부의 시녀로 만들려고 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는 어떤 시호가 가당할까? 아빠는 이렇게 지어본다. 망난공(亡亂公). “도리를 잊고 권력에 빌붙어 제 이익을 위해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었으니 나라를 망(亡)하게 하는 자요, 바로 서야 할 법을 비틀고 그에 대한 신뢰를 어지럽혔으니 이를 난(亂)이라 한다.” 에이 망난공 같으니라고. 영헌공 보기가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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