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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은 어쩌다 살가죽이 벗겨졌을까

그림 ‘캄비세스의 재판’에는 돈을 받고 판결을 내린 재판관 시삼네스가 끔찍한 처벌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재판관의 부정이라는 범죄가 그만큼 치명적이고 무겁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7월 11일 수요일 제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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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화가 헤라르트 다비트가 그린 ‘캄비세스의 재판’.
재판정 건물에 이 그림이 걸렸다.

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헤라르트 다비트(1460~1523)는 브뤼헤라는 도시로부터 회의장과 재판정으로 쓰이는 건물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받고 B.C. 6세기의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내놓았어. 당시 돈을 받고 판결을 내린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로부터 끔찍한 처벌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었지.  

그림 속에서 처형대 위 결박된 시삼네스는 산 채로 그 피부가 벗겨지고 있어. 살아 있으나 죽느니보다 못한 시삼네스의 고통 그득한 표정과 사형 집행인들의 잔인한 손놀림이 그럴 수 없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지. 캄비세스는 그렇게 벗겨낸 살가죽을 시삼네스가 앉아 있던 의자에 깔게 한 뒤 시삼네스의 아들을 불러서 말해. “이제부터 네가 재판관이다. 저 자리에 앉아라. 네 아비의 살가죽 위에서 네가 어떻게 판결할지를 항상 고민하라.” 이게 ‘캄비세스의 재판’이라고 불리는 그림이야.

캄비세스는 왜 그렇게 유달리 끔찍하고 곱절로 고통스러운 방식의 처벌을 사용했을까? 그건 바로 재판관의 부정이라는 범죄가 그만큼 치명적이고 무거운 범죄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거야. 판관(判官)들의 판결은 곧 법으로서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힘을 지니는데, 돈이나 사적인 관계나 기타 등등 때문에 법에 어긋날 판결을 내는 것은 그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지 않겠니.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으며 그 사례까지 친절히 밝힌 보고서가 공개된 바 있지. 삼권분립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판결을 존중하라고 툭하면 떠들어대던 그들은 그 손으로 행정부 수반의 비위를 맞출 만한 판결문을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단다. 또 그들은 입으로는 “우리는 이렇게 협조하고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며 정권에 아부하고 있었다. 그래 놓고도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기는 대법관들을 보면 캄비세스가 저승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오늘부터 몇 주간, 우리 역사에서 그 어떤 압박과 유혹 속에서도 소신과 원칙을 지켜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운”, 또 현명한 판결로 뭇 사람들에게 법의 의미를 일깨웠던 몇몇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손변(孫抃)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경상도 안찰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한 송사에 직면하게 돼. 재산을 둘러싼 남매의 송사였어. 남동생의 주장. “한 부모의 자식들인데 어찌 누이에게만 재산이 돌아가고 제게는 재산이 없단 말입니까.” 누나의 주장.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검은 옷 한 벌, 검은 관 하나, 신발 한 켤레, 종이 한 장만 동생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맡으라 하셨습니다. 어찌 부모의 말을 어기겠습니까.” 둘의 주장은 팽팽했어. 알고 보니 몇 년을 이어온 송사였다. 아버지의 유언장은 명확했으나 남동생의 호소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손변은 이 송사의 결론을 내려.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은 똑같은데 어찌 시집간 딸에게는 후하고 부모 잃은 아들에게 박하겠는가. 아버지가 돌아갈 때 어린 아들이 의지할 곳은 누나뿐인데 재산의 반을 아들에게 줄 경우 누나가 남동생을 사랑함이 덜하여 양육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아들이 장성하면 상속의 몫을 찾기 위해 의관 정제하고 탄원을 쓸 수 있도록 옷과 관, 종이와 붓을 유산으로 남겼던 것이다.”

ⓒ시사IN 윤무영
6월5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 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재산을 관리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들에게 재산이 넘어가면 누나의 관심이 덜해질 것은 말할 나위 없고, 그 재산을 탐낸 이들이 반드시 꼬이게 마련. 아버지는 장성한 누나에게 전 재산을 주어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는 한편, 아들이 장성하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상징적인 물건들을 남겨주었던 거야. <고려사>의 손변 열전(列傳)에는 이 판결을 들은 남매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했으니 재산 문제로 다투긴 했으나 의가 나쁘지 않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현명한 판관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남매였다고 생각되는구나. 

여기서 잠깐 고려 시대의 풍습을 들여다보자. 우선 21세기 한국에서도 버젓이 살아 움직이는 ‘장자 상속’ 같은 건 고려 사람들에게 낯선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아들과 딸 차별이 없었고 딸에게도 아버지의 재산이 균등하게 상속되었어. 출가외인 따위 개념은 당시에는 흔적도 없었고 말이야. 하나 더, 가문의 재산과 권리가 딸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으니 여성의 지위가 조선 시대나 심지어 요즘에 비해서도 꽤 당당했으리라는 것. 그래서 고려 귀족 사회에서 세도가 당당한 집의 딸과 결혼한다는 건 출세의 직행 코스였고 출세를 위해 본부인과 이혼을 불사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어. 대표적인 예로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을 들 수 있어.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내와 결혼해서 그 재산을 바탕으로 출세했는데,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의 딸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섬에 버리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니까.

한편 손변의 아내는 왕실의 후예이지만 서출(庶出)이었어. 이런 아내의 신분은 남편의 벼슬길에 결격사유가 되었단다. “아내의 계보가 왕실의 서족(庶族)에 연계되었으므로 대성(臺省)·정조(政曹)·학사(學士)·전고(典誥)에 임명될 수 없었다 (<고려사> 손변 열전).” 즉 아내의 신분 때문에 남편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에 갈 수 없었던 거야. 아내는 안타까이 권했다지. “내 계보가 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나를 버리고 세도 있는 집에 장가드십시오.” 경상도 안찰사 시절의 명판결에서 보듯 유능한 관료로 꼽혔던 손변이 새장가를 들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만 그는 아내의 권유를 뿌리치고 아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고 해.

권력보다 인간의 도리에 충실했던 법관

그라고 해서 왜 욕심이 없었을까. 그의 원래 이름, 부모님이 주신 이름은 손습경(襲卿)이었어. ‘벼슬을 세습’한다는 뜻이야. 아마도 대대로 잘나가는 집안이었고 그 희망이 담긴 이름이었겠지. 손변 아니 손습경은 이름이 불릴 때마다 언젠가 자신이 앉게 될 거창한 벼슬자리를 꿈꾸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손변은 그 꿈을 스스로 버리고 이름까지 바꿔버렸어. 그는 권력에 취하기에는 인간의 도리와 상식에 워낙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구나.

그가 스스로 바꾼 이름 변(抃)은 ‘손뼉 치다’라는 뜻이야. 무슨 의미였을까. 사랑하는 아내, 출신 때문에 남편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내와 통쾌하게 손뼉을 치며 “우린 괜찮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 권력과 부귀영화 쪽으로 머리가 향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최소한의 정의를 위해 손 모으던 백성들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고픈 마음이었을까. 그 깊은 뜻이야 아빠가 알 수 없다만, 권력을 위해서 아내마저 가차 없이 버리던 당시의 군상들이 손변을 어떻게 보았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아울러 “판결이 곧 법”인 대한민국의 사법 권력들이 과거 고려의 허접한 양반들 마누라 팔아치우듯 그 양심과 명예를 내팽개치는 걸 보았다면 손변은 그 이름을 박수칠 변자가 아니라 손괵(摑·뺨때릴 괵)으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법에 대한 백성의 신뢰는 하늘 같은데 어찌 권력에 후하고 법률과 양심에 따른다는 헌법에는 박하였는가. 생각건대 벽란도 장마당에서 행인 모두에게 뺨을 내밀고 때려달라 청해야 마땅한 죄로다”라고 준엄하게 논고하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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