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주 뉴욕 시에 있는 브루클린 자치구 북서부 지역에는 110㏊ 규모의 선셋 공원이 있다. 공원 이름을 따 그 지역 일대를 ‘선셋 지구’라고 부른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브루클린이 이민자의 동네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모스크와 성당이 지척이고 곳곳에서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들을 수 있다. 5월30일 선셋 공원 서쪽 출입구 바로 앞에 위치한 한 가정을 방문했다. 제니퍼 페딜라와 그녀의 딸 메디슨 로드리게스가 ‘커플 옷’을 맞춰 입고 취재진을 반겼다. 몇 가닥 안 되는 곱슬머리를 한데 모아 하나로 묶은 메디슨이 낯가림도 없이 곧장 다가왔다. 아장아장 불안정하게 걸음을 옮기더니 금세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갓 돌을 지난 메디슨이 방긋 웃었다.

방을 제외하고는 9.9㎡(3평) 남짓한 거실이었다. 살림살이가 단출하지만 깔끔했다. 소파 옆에 놓인 아기침대 위에는 ‘손을 씻은 다음 아이를 만지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곳곳에 아이와 외사촌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메디슨이 부엌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거실과 부엌 사이에 가림막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 메디슨은 엄마·외삼촌과 함께 지낸다. 올해 서른 살인 제니퍼는 ‘싱글맘’이다. 메디슨을 임신했을 때 아이 아빠와 헤어졌다.

제니퍼는 ‘헬시 패밀리 선셋파크(Heal -thy Family Sunset Park·HFSP)’의 가정방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2011년 미국 보건복지부가 인증한 가정방문 프로그램 중 하나인 ‘헬시 패밀리 아메리카(HFA)’가 그 기원이다. HFA가 공인한 뉴욕 주의 ‘헬시 패밀리 뉴욕(HFNY)’은 HFSP 같은 비영리기관을 통해 지역마다 가정방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HFA는 1992년 미국의 아동학대 방지단체인 PCAA(Prevent Child Abuse America)가 아동학대 예방을 목적으로 만든 가정방문 서비스다. 1970년대 하와이의 한 소아과 의사가 시작한 가정방문 서비스의 실적을 기반으로 했다. 이 프로그램은 아동학대와 방임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신생아 부모에게 개입하는 것이라는 데서 착안했다. 훈련받은 가정방문사(familly support worker)가 여성의 임신 단계에서부터 가정을 직접 방문해 무료로 부모 교육을 하거나 각종 어려움을 상담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연결해준다. 10대 부모,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 등이 주 대상이다. 아이의 출생 직후부터 취학 전까지(5세) 지원한다. 각종 연구 결과에서 이 프로그램이 아동학대의 위험을 낮출 뿐만 아니라 저체중 방지 등 아동 건강 개선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시사IN 이명익가정방문사인 클로이 글릭먼 씨(왼쪽)는
메디슨 로드리게스(가운데)를 키우는 제니퍼 페딜라 씨(오른쪽)의 집을 1년 넘게 방문하고 있다.

거실이 폭 좁은 직사각형 구조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는 소파였다. 가정방문사인 클로이 글릭먼이 메디슨의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 “식탁 같은 걸 잡고 잘 걸어 다니나요?”. “그렇긴 한데 너무 뒤뚱뒤뚱 불안정하게 걷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돼요.” 제니퍼의 우려에 클로이가 답했다. “그게 정상이에요. 조금씩 나아지다가 잘 걷게 될 거예요.” 클로이가 〈GGK (Growing Great Kids)〉 책을 꺼냈다. 가정방문사들이 참고하는 매뉴얼이다. 신생아부터 5세까지 개월 수에 따라 성장 발달 과정이 적혀 있다. 메디슨의 경우 13~15개월 연령대에 속한다. 책에는 이 시기 아동의 관계 맺기, 신체 상태, 배변 활동, 감정 발달, 자아의 성장을 비롯해 노출을 줄여야 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까지 세세히 담겨 있다. 가정방문의 주된 활동 내용은 부모 교육이다. 미국은 보육기관에 보내는 비용이 비싸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 대개 가정양육을 한다. 제니퍼는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가정방문의 주 활동 내용은 ‘부모 교육’

이날 상담에서 클로이는 아이의 뇌 발달을 강조했다. 이중 언어가 뇌 발달에 좋은 영향을 주므로 영어와 (제니퍼의 또 다른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동시에 써주라고 했다. 물을 ‘water’로도, ‘agua’로도 말해주라는 식이다. 뇌의 어떤 부위가 신체 기관과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한 뒤 지난 1주일 동안 메디슨의 신체 활동이 어땠는지 확인했다. 제니퍼는 아이가 침대에서 내려올 때 서툴러 걱정이 많아 보였다. 클로이는 메디슨이 침대를 오르내릴 때 몸의 오른쪽과 왼쪽을 골고루 쓰는지 물었고 곧 익숙해질 거라고 말했다. 아기와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아이를 무릎 위에 놓고 흔들어주기를 소개하며 상호작용하는 법을 안내했다. 크레용을 손에 쥐여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벽에 종이를 붙여놓으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제니퍼가 “친정어머니가 기저귀 떼는 데 관심을 보인다”라고 말하자, 클로이는 “이제 한 살이니 1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둘이 대화하는 도중 메디슨이 엄마의 왼손등을 물었다. 제니퍼가 웃으며 “그렇게 하면 엄마가 아프다”라고 타일렀다. 클로이는 제니퍼에게 “소리지르지 않고 아이에게 반응하는 건 잘한 거다”라고 말했다. 클로이와 제니퍼의 대화는 40여 분간 이어졌다(보통은 1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클로이는 제니퍼가 잘하고 있다는 점을 몇 차례 강조했다.

제니퍼의 오랜 고민은 아이 아빠와의 관계였다. 10년 가까이 사귀었는데 제니퍼가 임신하자 떠났고 그녀는 크게 낙심했다. 도움받을 곳을 찾다가 이웃의 소개로 지역 가족지원센터에서 윅 프로그램(WIC :저소득층 임산부와 아이를 대상으로 먹을거리 및 영양 교육을 제공하는 미국 정부의 서비스)을 알게 되었다. 센터에 들렀다가 HFSP를 접했다. 처음엔 미심쩍었지만 일단 해보고 안 맞으면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신청한 게 1년도 더 된 이야기다. 메디슨은 아빠와도 왕래를 한다. 제니퍼는 “메디슨이 지난주 아빠한테 다녀왔는데 얼굴에 상처가 나서 왔다. 아빠 노릇을 못해 큰일이다.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제니퍼의 하소연을 듣던 클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었다. 아이를 그냥 보내지 말고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사전에 충분히 설명해주라는 조언을 건넸다.

곁에서 지켜본 두 사람은 가정방문사와 이용자를 넘어 꽤 친밀해 보였다. 제니퍼와 클로이가 1주일에 한 번씩 만난 지 1년이 넘었다. 클로이는 태아였던 메디슨이 아장아장 걷기까지 가장 근거리에서 두 사람의 성장을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제니퍼처럼 홀로 아이를 키우며 고립되기 쉬운 임산부에게 HFSP의 가정방문 프로그램은 바깥과 연결되는 고리가 되기도 한다. 제니퍼는 “아이를 키우려면 강해져야 하는데 서비스를 받으면서 실제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웃음). 부모 교육을 통해 아이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게 됐다. (육아 지식이 부족한) 10대 엄마가 아니더라도 서비스를 받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저소득층 여성·아동을 지원하는 10여 개 NPO가 입주해 있는 브루클린 선셋 지구의 가족지원센터.

가정방문사인 클로이는 이 일대 18개 가정을 방문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니퍼만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 나머지는 멕시코, 과테말라 등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로 영어에 서툴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브루클린 지역 우편번호 11220)에 거주하는 약 12만명 중 히스패닉이 42.6%, 백인이 36.2%, 아시아계가 29%, 흑인이 3.2%였다 이 중 약 29%가 빈곤층으로 집계되었다. 클로이가 담당하는 가정들 역시 대부분 교육수준이 낮고 소득도 적은 편이다. 클로이는 “이민 온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외로움을 많이 호소한다. 뉴욕이라는 메가시티에서 역으로 고립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가족 모임을 만들어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동네를 걷다 보면 옛 고객들이 함께 다니는 걸 목격하는데 그럴 때 뿌듯하다”라고 말했다. 뉴욕 시의 아동서비스관리국(ACS)에 따르면 지난해 선셋 지구의 아동학대 수사 건수는 663건으로 뉴욕 시 전체(59개 지구)에서 36번째이고, 아동복지 예방 서비스를 경험한 아동의 수는 1530명으로, 8번째 수준이었다.

 

가정방문사는 상담을 시작할 때 부모에게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한다. 제니퍼의 목표는 메디슨이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취업이었다. 아이는 40분 내내 한 번도 울지 않고 낯선 방문객에게 끝없는 웃음으로 호의를 보였다. 한 가지 목표는 이룬 셈이다. 목표에 도달하거나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면 서비스가 종료된다. 

클로이는 4년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이 일을 한 지는 2년6개월 정도 되었다. 가정방문사가 되기 위해 6개월 이상 훈련을 받았다. 가정방문사 대부분은 2년제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했다. 클로이는 “HFA 모델은 사람들의 강점(strength approach)을 강조한다. 잘못한 걸 지적하기보다 부모의 좋은 점을 보려고 한다. 대화를 하면서도 리액션에 신경을 쓴다”라고 말했다. 이용자 모두가 제니퍼처럼 우호적인 건 아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했다가 마음이 바뀌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문자나 카드 등을 보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특히 이 프로그램이 아동학대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굉장히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는 한 살 때 아이가 기저귀를 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기대하면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생겨 아이를 때리거나 상처 주는 일이 발생하기 쉽다. 1년 안에 기저귀를 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려주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안 하도록 적절한 지식을 주는 게 예방에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부모의 스트레스가 아동학대로 이어진다

미국에서도 아동학대 가해자의 대부분은 부모다.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국의 2016년 아동학대 보고서를 보면 아동학대 가해자의 77.6%가 부모, 6.2%가 친척, 부모의 비혼 파트너가 3.6%였다. 특히 학대 및 방임으로 인해 사망한 아동(1750명)의 70%가 3세 미만이었다. HFA의 가정방문 프로그램은 부모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뉴욕의 아동학대 방지 단체 중 하나인 PCNY(Prevent Child Abuse New York)의 팀 해서웨이 전무는 “아동학대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나쁜 부모가 아이를 학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드물고, 주된 이유는 스트레스다. 많은 경우 처한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으로 이어져 아이를 험하게 다루거나 방치하게 된다. 부모들을 보조하면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게 학대를 예방하는 길이고 시와 정부가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HFA의 또 다른 목표는 긍정적인 부모와 자식 관계를 지원하고 아이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있다.

미국은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할 때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심한 경우 사법 처리로 이어지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을 시 최대한 원 가정을 재건할 수 있도록 부모와 아이에게 각종 서비스를 지원한다. 아동학대 사건의 수사와 사례 관리는 정부기관이 하고 예방이나 사후 서비스는 전문성을 지닌 민간 기관에 맡긴다. 특히 최근에는 예방을 강조하는 추세다. 예방에도 3단계가 있다. 학대 요인과 상관없이 전체 가정을 대상으로 한 1차 예방, 위험 요소가 높은 가정을 선별해 집중 관리하는 2차 예방, 사후에 재발 방지를 위한 3차 예방이다. 어린 부모,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HFA 모델은 2차 예방에 해당된다. 뉴욕 주 아동가정국(OCFS) 미디어 담당인 크레이그 스미스 씨는 “뉴욕 주는 아동학대와 관련해 사전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사후 예방 서비스를 강력하게 지원한다. 예방이 돈과 노력을 가장 덜 들이는 방법이다. HFNY에 등록된 아이들과 가족들이 학대와 관련해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는 증거가 있다. 아동학대는 어디서나 일어나기 때문에 배경, 지위, 인종, 사는 곳에 관계없이 모든 부모들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지원이 주로 2~ 3차에 집중되어 있어서 1차 예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도 높다. 미국의 다층적인 예방 프로그램은 사후 처리에 급급한 한국의 아동학대 대응 시스템에도 시사점을 준다.

 

 

 

 

 

 

기자명 뉴욕·글 임지영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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