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역사의 총여학생회가 존폐 위기에 놓였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6월13~15일 학생총투표를 개최하고 ‘총여학생회 재개편 요구의 안’을 통과시켰다. 전체 재적생 가운데 55.16%가 참여한 총투표에서, 82.24%가 재개편 ‘찬성’에 손을 들었다.

발단은 지난 5월24일 연세대 총여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마련한 은하선 작가의 강연이었다. 이를 두고 연세대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은 작가는 ‘남성 혐오’를 조장하는 인물이며 십자가 모양 딜도(자위 도구)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이 주요 반대 논리였다. 이들은 은 작가와 강연 주최 측 모두를 극단적 페미니즘 세력으로 규정했다. 강연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강연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주최 측은 은 작가의 강연은 공개 강연이며, 강연 내용에 대한 반대 토론도 강연장 내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유로 예정대로 행사를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연세대 총여학생회 재개편에 반대하는 현수막.
강연 반대 측은 1300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서명한 종이를 모아 은 작가의 강연 직전에 들고 갔지만 ‘다수의 의견’이 현장에서 묵살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곧바로 ‘조직화’를 선택했다. 강연 다음 날인 5월25일, 제29대 총여학생회 ‘모음’ 퇴진 및 총여 재개편 추진단(이하 추진단)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불과 하루 만에 ‘은하선 강연 반대’라는 구호는 ‘총여학생회 퇴진과 개편’으로 바뀌었다.

추진단은 총여학생회로 인해 인권 사각지대가 생긴다며, 총여학생회를 학생인권위원회로 바꾸고, 참여 구성원도 여학생에서 모든 학생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사실상 총여학생회 폐지안이다. 총여학생회는 결사권과 자치권을 가진 선출 기구다. 여학생에게만 선거 및 투표 권한이 있는 만큼, 남학생이 폐지 또는 개편한다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진단의 ‘서명 규모’는 빠르게 확대됐다. 하루 만에 2000명 넘는 인원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온라인에서는 “남학생이 내는 학생회비가 총여학생회 운영에 쓰인다”라는 주장이 전면에 등장했다. 학생회 예산은 본래 학생 사회 내 다양한 목소리를 지원하기 위해 분배되지만, 이런 명분은 통용되지 않았다. “우리도 돈 냈으니 총여학생회의 존폐를 논할 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옮겨갔다.

추진단은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언어’를 선점한다. 특히 절차와 정당성이라는 개념은 이들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추진단이 5월25일 발표한 입장문을 보면 “(우리는 이번 문제를) 학생 사회의 의결 절차 및 민주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로 인식한다”라고 규정했다. “앞으로 대화를 인권운동 문제로부터 명확하게 분리하여 민주적 의결 구조 위주로 논의할 것을 총여학생회에 요구”한다는 대목도 이들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혐오·차별·인권 같은 추상적 논쟁 대신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기계적 잣대가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시사IN 신선영대자보는 훼손되거나 찢겼다.
추진단이 총여학생회 재개편 총투표가 가능하다며 내세운 근거는 총학생회 회칙이다. 총학생회 회칙을 문구 그대로 해석하면 총여학생회는 학생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 집단이고, 전체 구성원의 10%만 확보하면 무슨 사안이든 학생총투표에 회부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투표라는 명쾌한 제도로 직행하면, 추상적이고 복잡한 논쟁도 없앨 수 있었다. 이때부터 대화의 여지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편리함은 특히 남학생에게 설득력을 가졌다. 총여학생회를 개편하자는 서명 명단 2604명 가운데, 약 2200명이 남학생이었다. 5월28일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가 열렸고, 닷새간 44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안건이 통과되었다.

다수의 중앙운영위원은 명문화된 ‘총투표 요건’을 충족하니 중앙운영위가 총투표 안건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는 논리를 견지했다. 몇몇 위원이 “그럼 사회대와 문과대 서명만 모아오면 공대 학생회를 재개편하자는 학생총투표가 열릴 수 있다는 거냐”라며 반박했지만, 대다수 위원들은 학생 다수가 모아온 의견을 묵살할 수 없다는 데 방점을 두었다. 총여학생회 개편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총투표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추진단을 비롯해 총여학생회 개편을 요구하는 이들은 오히려 ‘참여 민주주의’ ‘소중한 투표권 행사’ ‘민주주의 절차 준수’ 같은 논리로 투표 독려운동을 벌였다. 결국 투표율은 50%를 넘겼고, 목적을 이룬 추진단은 6월15일 활동 21일 만에 자진 해산했다.

개표 이후 ‘재개편 절차’ 두고 논쟁도

추진단은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부유하던 ‘총여학생회에 대한 반감’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왜 굳이 총여학생회가 필요하냐는 질문은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동일하게 제기됐다. 총여학생회의 존치를 지탱해온 당위성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성평등·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자치 기구가 여전히 학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 지으려는 일부 남성의 시각은 총여학생회를 ‘은하선과 비슷한 수준의 논의를 벌이는 이들’로 규정했다. 추진단이 등장한 5월25일부터 총여학생회는 ‘남자가 돈을 내지만 정작 나쁜 페미니즘으로부터 잠식되고 마는 일종의 적폐 단체’라는 프레임이 통용됐다.

ⓒ시사IN 신선영연세대 총여학생회 재개편 총투표 결과 ‘찬성’이 높게 나왔다. 아래는 연세대 총여학생회실.
총여학생회에 대한 견제나 폐지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연세대 총여학생회만 해도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후반에 각각 ‘총여학생회 탈(脫)페미니즘’을 주장한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총여학생회라는 제도화된 기구 내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 권력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남성 중심의 ‘청원’이 총여학생회의 기반을 무너뜨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과 가장 큰 차이는 페미니즘을 둘러싼 환경이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 이후 여성의 말하기가 확대된 만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성의 반감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연세대 교정에 걸린 총여학생회를 지지하는 졸업생 모임이 내건 현수막은 칼로 찢겼고, 중앙도서관 앞 총여학생회 지지 내용을 담은 일부 대자보 역시 찢긴 채 나뒹굴었다.

연세대 총투표 사태는 이런 일부 남성들이 직접 조직화에 성공하고 다수를 확보해 정치적으로 제도를 뒤엎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성평등을 ‘인권’으로 희석하고, 폐지를 ‘개편’으로 내거는 방식은 연세대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김영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은 “백래시는 표면적으로 혐오와 반격의 뉘앙스를 풍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인권·민주주의·평등·효율성·절차적 공정성 같은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개표 다음 날인 6월16일, 연세대 중앙운영위는 재개편 절차 역시 어디까지나 총여학생회 구성원인 여학생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개표 결과만 놓고 보면 연세대 총여학생회의 운명이 모두 결론 난 듯하지만,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에 총여학생회 폐지를 주장했던 일부 학생들은 중앙운영위의 결정이 자신들의 뜻을 왜곡했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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