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미래를 규정할 수 없고, 어제의 분쟁이 내일의 전쟁일 필요도 없다. 역사가 거듭 증명했듯이 적도 진실로 친구가 될 수 있다.” 6월12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는 양국 간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장을 써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야심찬 계획 때문에 워싱턴 외교가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비즈니스 협상을 생업으로 삼았던 트럼프 대통령. 그가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승부수를 던진 뒤 증오와 불신으로 얼룩진 북·미 관계가 70여 년 만에 근본적인 변혁기에 접어들었다. 공동성명에는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이 명문화되었다. 누구보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새로운 관계 수립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 찬반양론으로 시끌시끌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5시간에 걸친 담판 끝에 내놓은 공동성명에는 미국이 줄기차게 외쳐온 ‘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라는 문구는 물론 구체적인 비핵화 스케줄조차 빠져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서 이번 합의가 과거 북핵 합의보다 못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협상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대사는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김정은 위원장이 생각하는 비핵화는 무엇인지, 또 언제 비핵화가 이뤄질지 트럼프 대통령이 명확하게 알아낼지 여부가 핵심이었는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라면서 실망감을 나타냈다. 대북 포용파로 분류되는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 북한 체제 안전보장, 정상회담 개최에 따른 정통성 부여 등 엄청난 양보를 했음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얻은 건 거의 없는 것 같다. 트럼프가 1라운드에서 완패했다”라고 혹평했다. 조지프 윤 전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CNN에 나와 “이번 공동성명에 나온 4개 합의 사항 모두 이전 합의문에 나왔던 것이다. 매우 실망스럽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 제공트럼프 대통령은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열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에 대해 “우리는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반면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지지파도 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에서 30년 이상 북한 분석가로 근무한 존 메릴 박사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기조를 정하기 위한 첫 정상회담에서 상세한 비핵화 합의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면 그야말로 우둔한 생각이다. 지금부터가 기나긴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불과 몇 달 전 북·미 양국이 전쟁 직전까지 치닫던 때를 생각하면 이번 정상회담은 큰 성공이다”라고 평가했다. 

민간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의 로버트 리트워크 국제안보연구소장도 〈뉴욕타임스〉에 “이번 정상회담은 핵 위기 심리를 반전시키고, 미국의 (북한에 대한) 예방적 군사행동 전망을 물리쳤다”라고 호평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앤서니 블링켄은 “우린 지금 1년 전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다”라고 회담 결과를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문가들이 내놓는 찬반양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입장이다. 그가 이처럼 자신만만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그가 정상회담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드러낸 감정 표현에 주목한다. 정상회담 하루 전날까지도 그는 “김 위원장을 만나면 1분 내로 그가 비핵화에 진지한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 뒤에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며 “아주 특별한 유대(very special bond)” “대단한 관계(terrific relationship)” 같은 화려한 수사까지 사용하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신뢰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는 “그렇다”라고 거침없이 답했다. 특히 그는 자신보다 38세나 어린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깍듯이 대하며 기자회견에서 “대단한 사람(terrific person)”, 심지어 “내 친구(a friend of mine)”라는 표현까지 썼다. 첫 만남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인물평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분을 활용해서 북한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라고 꼬집었다.

정치권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조심스러운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부정적이다. 민주당의 찰스 슈머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해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의원, 브라이언 샤츠 상원의원,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 등은 “받은 것도 없이 중대한 양보를 했다”라고 평가했다. 과거 클린턴과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 시절 대북 포용 노선을 견지했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반대 입장을 취하는 형국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북한이 자국의 체제 안전보장을 조약 형태로 요구할 경우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 약속 지키리라 믿는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첫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후속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외교안보팀을 불러 모아 회담 결과를 평가하고, 공동성명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에 나설 것이다. 특히 폼페이오 장관은 북·미 정상회담 다음 날인 6월13일 방한했다. 그는 6월14일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도 이번 협상을 잘 이해하고 비핵화를 빨리하고 싶어 한다”라고 강조했다.

북·미 사이 앞으로 예상되는 쟁점은 ‘완전한 비핵화의 개념’ ‘신고 대상’ ‘검증 방식’ 등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선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박사는 〈워싱턴포스트〉에 “후속 협상이 열리는 경우, 폼페이오 장관이 가장 먼저 부닥칠 문제는 ‘어떻게 하면 북한이 핵 무력을 완전히 신고하게 될 것인가’이다”라고 말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 대학 교수도 NBC 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이 일부 핵무기를 숨기고 신고하지 않을 경우 검증할 방법이 없다. 폼페이오 장관은 후속 작업 차원에서 하루속히 북측 상대를 만나 구체적 비핵화 사항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는 확고한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는다. 그가 귀국하는 대로 비핵화 프로세스를 곧바로 시작할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도 과거 북·미 간 합의의 번복 선례를 감안한 듯 “6개월 뒤 여러분 앞에서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라며 다소 여운을 남겼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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