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건대 비극이었다. 브라질 정부는 월드컵 대신 민생을 책임지라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억누르고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을 유치했다. 월드컵 폐막 후 3개월 뒤 브라질 대선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지우마 호세프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월드컵에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물론 정치적 이슈와 별개로 ‘축구 천국’ 브라질 축구계도 이 월드컵에 사활을 걸었다. 자국 축구의 중흥기를 이룰 기폭제로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악몽으로 끝났다. ‘에이스’ 네이마르(파리 생제르맹)가 허리 부상으로 도중에 낙마한 후, 브라질은 갑자기 힘을 잃었다. 독일에 1-7이라는 대참패를 당한 ‘미네이라수(미네이랑의 비극)’ 이후 브라질 축구는 만신창이가 됐다. 3위 결정전 네덜란드에도 1-3으로 무너졌다. 세계 최강을 자처했던 브라질 축구의 자존심이 숫제 나노 단위로 박살났다.

브라질은 한동안 방황했다. 이기는 건 당연하고 화끈해야 한다는 기조를 버리고 ‘실리주의자’ 카를루스 둥가 감독을 선임해 결과에 집착하는 축구로 선회했다. 화려한 축구는 차후로 미루고 잃어버린 승리 DNA를 되찾고자 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둥가 감독 체제도 실패했다.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했더니, 그 아래에는 불지옥이 있었다. 2015 코파 아메리카 칠레에서 8강, 2016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는 아예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 ‘축구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브라질 축구도 이제 끝이라는 푸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을 것이다. 그럴 만했다. 브라질은 초대 대회인 1930 FIFA 우루과이 월드컵 이후 전 대회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국가이며, 역대 최다인 다섯 차례 우승을 거머쥔 월드컵 역사가 보증하는 최강의 팀이었다. 1994 FIFA 미국 월드컵을 기준으로 세 차례나 대회 결승에 올라 두 번의 우승(1994·2002)을 경험했다. 세계 축구의 헤게모니는 돌고 도는 법이지만, 브라질은 지난 20년간 최강자를 논함에 있어 늘 가장 먼저 거론되던 팀이었다. 그런 팀이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정상과 시나브로 멀어지더니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이후 크게 몰락하고 말았다.

ⓒAP Photo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치치 감독
러시아행 티켓 맨 처음 거머쥔 브라질

하지만 2016년 치치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브라질은 과거의 우승 후보의 면모를 완벽하게 되찾았다. 브라질은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18전 12승 5무 1패(승점 41점)를 기록, 남미 1위 자격으로 ‘동토’를 밟게 됐다. 참고로 개최국 러시아를 제외하고 전 세계 예선을 통틀어 가장 먼저 본선행 확정을 알린 팀이 브라질이다.

치치 감독은 브라질 특유의 공격 축구 색깔을 살리되 전술적 측면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전 세계 축구팬들은 ‘브라질 축구’ 하면 현란한 개인기로 수비수를 제쳐 골을 넣는 선수를 떠올린다. 브라질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전술은 최소한의 밑바탕일 뿐, 때로는 구차하게 여기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대 축구 전술의 발달로 이제 그런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천하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리오넬 메시도 그들의 절대적 개인기를 전술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구현하는 시대다. 치치 감독은 이 점을 주목했다. 돌파가 아닌, 패스와 ‘오프 더 볼 무브먼트’로 상대 골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공격을 전개하는 것에 주력했다. 치치 감독의 정확한 처방전은 본디 개인기만은 세계 최고 수준인 브라질 선수들에게 날개를 단 격이었다. 브라질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러시아행을 확정한 이유다.

ⓒAP Photo네이마르(파리 생제르맹)
심지어 치치 감독의 브라질은 에이스인 네이마르 없이도 강한 팀을 만들어냈다. 네이마르가 부상으로 빠진 지난 3월 A매치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미네이라수라는 치욕을 안긴 독일에도 승리했다. 작금의 브라질은 독일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월드컵 개막에 맞춰 우리가 아는 브라질로 돌아온 것이다.

브라질은 러시아 월드컵 E조에서 스위스·코스타리카·세르비아와 한 조에 속해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만만찮은 내공을 가진 두 유럽 팀과 강력한 수비를 자랑하며 지난 대회서 8강 돌풍을 일으킨 코스타리카의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위협이 될 수 있는 팀일지는 몰라도, 냉정히 브라질을 부러뜨릴 만한 힘을 가진 상대는 아니다. 다른 톱시드 팀에 비해 다소 까다로운 대진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브라질이 이들을 연거푸 쓰러뜨리고 16강 티켓을 가져갈 확률은 여전히 높다.

물론 브라질이 ‘완전무결한 팀’은 아니다. 특히 오른쪽 수비를 책임졌던 베테랑 다니엘 알베스의 공백은 지난 2년간 수비 강화에 큰 공을 들여온 치치 감독에겐 매우 큰 골칫거리다. 알베스가 네이마르와 더불어 팀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한 선수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브라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선수층이 두꺼운 국가다. 알베스의 공백은 다닐루·파그너 등 못잖은 기량을 가진 실력자들이 대체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빠지는 구석이 없는 팀이 바로 브라질이다.

그런 브라질에게 최대 관건은 조 1위 돌파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E조의 16강 진출 팀은 한국이 속한 F조에서 살아남은 팀들과 16강에서 8강 진출을 다툰다. 크로스 토너먼트라 조별 리그 순위가 확정되는 순간 대진이 결정되는데, 만에 하나 브라질이 조 2위에 그치게 된다면, F조 1위가 유력시되는 ‘전차군단’ 독일과 외나무다리 혈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제3자에게는 미리 보는 결승전일지 모르나, 브라질은 절대 바라지 않을 시나리오다. 독일을 피해 E조 1위 16강에만 진입한다면 객관적 전력상 8강까지는 무난하게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4강 이후부터는 그 어느 팀을 만나도 진검승부일 수밖에 없는 만큼 일단 준결승 고지까지는 안정적으로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AP Photo가브리엘 제수스(맨체스터 시티)
한숨 고른 네이마르의 더 커진 존재감

4년 전 브라질 월드컵 때 경험한 실패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오로지 네이마르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네이마르가 콜롬비아전에서 허리를 다치면서 브라질의 운명도 끝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네이마르는 4년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파괴적인 공격수로 거듭났다. A매치 83경기에서 53골을 성공시키고 있는 네이마르는 브라질 A대표팀 역대 득점 4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등 이전보다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소속 팀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해 3개월여를 쉬어야 했으나, 한숨을 고르고 대회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도리어 전화위복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AP Photo필리페 쿠티뉴(바르셀로나)
네이마르와 함께 브라질의 매서운 공격을 책임질 선수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하고 있는 신성 가브리엘 제수스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고 있는 필리페 쿠티뉴다. 제수스는 2000년대 레전드인 호나우두 이후 끊겼다는 브라질 스트라이커의 맥을 이을 만한 대형 스트라이커다. 이른바 ‘9번 선수’로 불리는 스트라이커는 2선 공격진의 파괴력에 좀 더 의존하는 최근 전술 경향 때문에 ‘멸종’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설 자리를 잃었다. 브라질은 그런 징후가 더 심했는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떨치며 그 고민을 날리게끔 했다. 쿠티뉴는 네이마르와 함께 2선 공격진을 책임질 ‘크랙’이다. 측면에서 상대 수비를 뒤흔드는 윙어는 물론이며 날카로운 패스로 공격에 힘을 보태는 쿠티뉴의 영민한 플레이는 브라질 공격진의 윤활유 구실을 한다. 이 트리오는 브라질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러시아 월드컵행을 확정 지을 수 있었던 동력을 불어넣은 엔진이었으며, 나아가 삼바 군단이 세계 정상에 오르는 데 가장 결정적 구실을 할 ‘삼대장’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제 네이마르 하나만 빛나는 팀이 아니다. 브라질은 과거 황금기에 필적할 만한 슈퍼 공격진을 앞세워 러시아로 향한다. ‘삼바 군단’은 이제 화려한 부활을 선언할 채비를 마쳤다.
기자명 김태석 (〈베스트일레븐〉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