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전 일이다.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후 지인들과 사석에서 ‘축구 화병’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 있다. 월드컵을 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현상이 흥미로워서였다. 어느 감독은 해외 축구 시청자가 늘어나면서 높아진 팬들의 눈높이와 전술적 격차를 언급했다. 다른 기자는 영역을 불문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분노의 정서를 짚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집단적 무력감과 우울에 빠진 때였다. 사회 곳곳의 병폐를 축구대표팀 운영(및 심각한 부진)에서도 확인하며 불신과 분노가 커졌다는 분석이었다. 지극히 축구적인 관점에서는, 일종의 당혹감이었다. 2002년의 성공부터 진보를 확인한 이들에게 ‘승리 없는 월드컵’은 낯선 그림이었다. 따지고 보면 월드컵은 긴 시간 도전의 무대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1승 고지’가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영역인 것처럼 멀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연합뉴스2002년 6월 서울광장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악마’
너희가 월드컵을 아느냐 (1954, 1986, 1990년)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54년이다. 아시아를 대표해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열린 아시아 예선을 통과했다. 한국은 숙적 일본을 꺾고 티켓을 따냈는데, 결전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선수단이 만난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선수단은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본선에서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B조에 속한 한국은 변방의 약소국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고, 경제 사정도 형편없었다. 미군 전용기를 빌려 타고 48시간을 날아간 끝에 첫 경기 전날에야 스위스에 도착했다. 상대는 헝가리. 푸슈카시와 코치슈 등이 포진한 당대 최강의 팀이었다. 시차 적응이나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경기에 나섰다. 〈한국축구백년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특별한 경합도 없이 한국 선수들이 차례로 쓰러졌다”라고 묘사한다. 결과는 0-9, 참패였다. 사흘 뒤 터키와의 대결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7골을 내주며 대패했다. 서독과의 3차전은 열리지 않았다. 한국의 탈락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호된 신고식이었다.

한국이 다시 월드컵에 서기까지는 그로부터 32년이 더 걸렸다. 본선 참가국이 24개국으로 확대되면서 아시아에 티켓 2장이 주어졌고, 한국과 이라크가 기회를 잡았다. 32년 만의 본선행이라는 기쁨도 잠시. 세계 무대는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한 조에 속했다. 전 대회 챔피언 이탈리아와 전전 대회(1978) 우승팀 아르헨티나(그리고 마라도나!)를 상대해야 했다. 이번 대회로 따지면 독일, 스페인과 한 조에 속한 셈이다. 개최국 멕시코에 대한 적응력도 떨어졌다. 조별 리그 1, 2차전이 열린 멕시코시티는 고지대였다. 코피가 터지고 배앓이를 하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멤버인 최순호 포항 감독은 “지금 생각해보니 고지대에서 운동하다 탈이 났던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선수단 지원 시스템도 미비한 시절이었다. 차범근 소속 팀 레버쿠젠의 재활 트레이너를 한시적으로 ‘임대’한 게 전부였을 정도다. 조별 리그 성적은 1무 2패. 불가리아와 1-1로 비겼고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 각각 1-3, 2-3으로 패했다. 32년 만의 본선 참가와 첫 승점, 매 경기 골을 넣었던 득점력 정도에 의미를 둘 만한 대회였다.

ⓒ연합뉴스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최순호 선수가 득점하자 기뻐하는 선수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초보적인 실수를 반복했다. 아시아 예선을 무패로 통과하며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했지만 정작 본선 준비에는 미숙했다. 대회에 임박해 이탈리아에 도착하면서 현지 적응에 실패했다. 선수들도 컨디션 난조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별 리그 상대국이던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당시 멤버였던 이영진(현 베트남 대표팀 수석코치)은 “벨기에 엔조 시포에 대한 정보는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너무 빠르고 기술적이었다”며 세계 무대 적응력이 떨어졌다고 인정했다. 그나마 황보관의 골이 위안이었다. 스페인전에서 프리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다. 114㎞/h로 측정된 볼의 속도에 ‘캐논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탈리아 대회에서 한국이 만든 유일한 골이었다.

투혼의 진화 (1994, 1998년)

1990년대 들어 한국 축구의 도전은 역동성을 갖는다. 1983년 출범한 프로 리그가 성숙기에 돌입했고, 2회 연속 본선 진출로 자신감도 쌓였다. 아시아에서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세계 무대를 통해 시야가 확장되면서 ‘선진 축구’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일본과의 라이벌전에는 좀 더 특별한 화학작용이 생겼다. ‘탈아시아’를 외치는 일본 앞을 번번이 가로막은 팀이 한국이었다. 1994 미국 월드컵을 향한 여정은 그 결정판이었다.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두 팀의 희비가 갈렸다. 4차전 맞대결에서는 한국이 일본에 패하면서 자력 본선행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북한을 이기고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면서 미국행 주인공이 바뀌었다. 한국이 극적으로 티켓을 얻었고 일본은 땅을 쳤다. 최종 예선이 열린 카타르 도하는 한국에 기적의 무대가 됐고, 일본에는 비극의 도시로 남았다.

ⓒ연합뉴스1994년 동점골을 터뜨린 서정원 선수.
극적인 기세는 본선까지 이어졌다. 당시 팀을 지휘했던 김호 감독은 본선에서 무더위가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을 대비해 일찌감치 체력 훈련을 진행했다. 전술적으로도 다양한 카드를 준비했다. 유럽 강호에 비해 기술이 떨어지는 약점을 활동량과 세트피스로 맞대응한다는 전략이었다. 기대 이상의 선전이 이어졌다. 스페인과의 1차전이 파란의 서막이었다. 0-2로 끌려가다 막판 추격으로 무승부를 만들었다. 홍명보의 프리킥이 스페인 수비벽을 갈랐고, 교체 출전한 서정원이 극적인 동점골에 성공했다. 중계 카메라를 향해 어퍼컷을 날리는 서정원의 세리머니가 두고두고 전파를 탔다. 3차전에서의 뒷심도 무서웠다. 전반전에만 세 골을 내주고 끌려가던 한국은 후반 들어 황선홍과 홍명보의 연속골로 맹추격에 나섰다. 김호 감독의 예상대로 폭염은 큰 변수였다. 40℃를 넘는 기온에 더 빨리 지친 쪽은 독일이었다. 후반 막판 급격히 흔들리는 분위기였다. 당시 멤버들은 “경기 시간이 5분만 더 있었다면 결과가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입을 모았다. 세계적인 강호들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펼치고 정신력으로는 오히려 앞섰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미국 대회에서의 선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4년 뒤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비교적 수월하게 지역 예선을 통과했다. 한국 축구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이 지휘하는 대표팀은 아시아 최강이었다. 최종 예선에서 숙적 일본을 적지에서 꺾은 ‘도쿄대첩’은 지금까지 명승부로 회자된다. 4회 연속 본선 진출에 2002년 월드컵 개최까지 확정하면서 지위도 달라졌다. 그러나 본선 무대는 불운과 비운의 연속이었다. 대회 직전 주전 공격수들이 줄줄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황선홍(무릎인대 파열), 서정원(수두), 이상윤(뇌진탕 증세)은 경기를 뛸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멕시코와의 첫 경기부터 꼬였다. 하석주가 선제골을 넣고 백태클로 퇴장당한 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3으로 역전패했다. 2차전에서 만난 네덜란드는 조 최강팀이었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0-5로 대패했다. 차범근 감독은 두 경기 만에 현장에서 경질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감독 대행 체제로 치른 벨기에와의 3차전은 이미 축구가 아니었다. 이임생의 ‘붕대 투혼’으로 압축되는 투지와 오기가 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유상철의 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아시아와 세계 무대 사이에 놓인 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한국 축구 전성기 (2002, 2006, 2010년)

한국 축구의 숙원은 한 세기를 보내고야 풀렸다. 월드컵 첫 승의 꿈을 이루고 단숨에 4강까지 뛰어올랐다. 축구에서 볼 수 있는 극적 서사를 모두 녹여낸 여정이었다. 변방으로 여겨지던 한국이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과 한 조에 속해 조별 리그를 무패(2승 1무) 1위로 통과했다. 이탈리아(16강전), 스페인(8강전) 같은 강호를 연달아 제압했다. 연장전, 골든골, 승부차기 같은 장치가 감동을 증폭시켰다. 4강에서 독일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은 오히려 현실적이었고, 터키와의 3-4위전을 ‘뷰티풀 게임’으로 마무리한 것은 전형적인 클리셰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사실 2002년의 신화는 축구라는 영역을 넘어선 사건이자 현상이었다. 광장에 모인 함성이 축제로 승화했다. ‘흥’으로 뭉친 건 해방 이후 처음이라는 사회적 의미가 붙었다. 태극기를 리폼하고, 태극무늬를 재해석해 자유롭게 걸치고 흔드는 세대의 등장에 문화사적인 분석도 이어졌다. 4강을 지휘한 거스 히딩크의 코칭 기술은 리더십의 교본이 됐다. 아시아 최초이자 최고의 고지에 올라선 한국 축구의 성공은 ‘붉은악마’의 카드섹션에 그대로 담겼다. Pride of Asia.

ⓒ사진공동취재단2002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을 꺾고 환호하고 있다.
2002년의 성공은 신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산을 남겼다. 히딩크와 함께 박지성과 이영표가 유럽으로 건너가 지평을 넓혔다. 이후 2000년대의 도전은 이들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유럽파가 많아지면서 세계 무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2006년 독일에서 원정 월드컵 사상 첫 승에 성공했다. 1차전에서 토고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뒀다. 선제골을 내주고도 이천수, 안정환의 연속골로 경기를 뒤집는 저력을 보였다. 프랑스와 2차전에서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다. 앙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경기 막판 박지성이 동점골을 만들었다. 스위스와 마지막 경기에서는 0-2로 패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졌지만 잘 싸운’ 경기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2010년 남아공 대회에서는 한발 더 나아갔다. 원정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16강 진출을 이뤘다. 외국인 사령탑 체제를 접고 국내 지도자 허정무 감독으로 완성한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그리스를 압도했고(2-0 승), 아르헨티나에 좌절했지만(1-4 패), 나이지리아와 비긴(2-2) 끝에 조별 리그를 통과했다. 한국의 지위는 과거와 사뭇 달랐다. 대회 내내 상대국들로부터 존중받았다. 그 중심에 박지성이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주력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경기력이 절정에 오른 그는 차원이 다른 리더십으로 대표

ⓒ연합뉴스홍명보 감독(왼쪽)과 손흥민 선수
팀을 이끌었다. 카리스마나 말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본을 보이는 것으로 팀을 통솔했다. 훈련 자세와 경기력 자체로 권위를 갖는 리더였다. 실제로 박지성은 그리스와의 1차전에서 완벽한 개인 전술로 골을 성공시키며 팀 승리를 견인했다. 대회 3연속 득점에 성공하는 아시아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영표의 조력도 빛났다. 둘은 상호 보완의 리더십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었다. ‘쌍용(기성용-이청용)’이라는 새로운 세대도 등장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완성형 스타였다면 쌍용은 이 대회를 통해 차세대 에이스를 예약했다. 기성용은 날카로운 프리킥과 조율 능력으로, 이청용은 남미 선수들에 견줄 만한 기술과 창조적인 움직임으로 한국의 골 사냥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한국의 도전은 16강에서 중단됐다. 우루과이에 1-2로 패했다.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내준 두 골이 뼈아팠다. 후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남미 돌풍이 거셌던 남아공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진짜 강팀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도 닿지 못한 4강에 진출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2014년)

성공 가도를 달리던 한국 축구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면서다. 구심점을 찾아야 했다. 전성기를 이끈 베테랑들의 공백은 생각보다 큰 그늘을 드리웠다.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다. 브라질로 향하는 과정은 1990년대 이전보다 더 험난했다. 본선을 준비하는 동안 감독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허정무 감독 후임으로 사령탑에 오른 조광래 감독은 3차 예선에서 약체 레바논에 패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뒤를 이은 최강희 감독은 “내 임기는 최종 예선까지”라고 선을 긋고 출발했다. 한시적 권위로는 팀을 장악할 수 없었다. 최종 예선 내내 유럽파-국내파 갈등설이 불거지고 경기력도 불안했다. 아슬아슬하게 본선행 임무를 완수한 뒤 미련 없이 대표팀을 떠났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던 시점, 축구협회가 꺼내든 카드는 홍명보였다. 선수와 코치로 월드컵을 5회(1990~ 2006) 경험하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한국 축구 사상 첫 메달 획득을 지휘한 레전드였다. 그러나 홍명보의 경험도 본선에서의 성공을 보장하진 못했다. 아시아 예선에서 드러난 불안감이 본선에서의 부진으로 재현됐다. 첫 상대 러시아와 비겼지만 알제리(2-4)와 벨기에(0-1)에 연달아 패했다. 특히 알제리전 패배는 충격이 컸다. 전반에만 세 골을 내주면서 무너졌다. 홍명보 감독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만 응시했다. 신화적 리더십이 무너지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만회골을 터뜨린 손흥민은 땅을 치며 눈물을 쏟아냈고, 추가골을 넣은 구자철도 고개를 떨궜다.

4년이 지나 다시, 월드컵이다. 이번에도 러시아로 향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또 한번 사령탑 교체(울리 슈틸리케-신태용) 홍역을 치렀다. 대륙 내에서 한국은 집중 견제 대상이었다. 시리아나 카타르처럼 한국보다 열세인 팀들은 아예 ‘밀집 수비’나 ‘침대 축구(그라운드에 드러누워 시간을 지연시키는 행위)’를 전략으로 들고 나왔다. 중국에도 당했다. 중국은 이탈리아 출신 명장 마르첼로 리피를 통한 자신감으로 ‘공한증(한국 축구에 대한 공포증)’을 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는 9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역사를 썼다. 끝내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 축구의 저력이다. 본선에서는 더 강한 상대를 만난다. 스웨덴, 멕시코, 독일이 기다리고 있다. 신태용 감독은 “통쾌한 반란”을 예고했다.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기자명 배진경 (〈포포투〉 한국판 취재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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