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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오가던 판문점 그날 이후 총탄 오갔네

휴전 이후 판문점에는 남과 북의 경계선이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다. ‘8·18 도끼 만행 사건’ 이후 판문점에 남북 경계선이 생기고 높이 5㎝ 콘크리트 선은 성벽처럼 남과 북을 갈라놓았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6월 20일 수요일 제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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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남북 정상회담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들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깜짝 방북’일 거야. 인사를 나누던 두 정상이 손을 잡고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이라 할 콘크리트 선을 훌쩍 넘어 북쪽 땅을 밟던 장면 말이야. 동시에 판문점에서도 남과 북이 서로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엄존한다는 걸 다시금 상기시킨 순간이기도 하지.

그런데 휴전 이후 오랫동안 판문점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어. 판문점에는 남과 북의 경계선이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남과 북의 경비병과 기자들은 곧잘 뒤섞였고 서로 농담도 하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심지어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술잔을 나누며 형·동생 먹기도 했단다. 1962년 9월5일 벌어진 실제 사건. “추석을 맞이한 남북한 경비병들끼리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자’고 술판을 벌였다. (…) 거나하게 취하자 병사들끼리 언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총격전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북한군 사병 3명이 사망하고, 장교 2명이 다쳤다(<경향신문> 2018년 4월26일자).”

‘쇠못 구두의 사나이’로 불린 박철 군관.

형 먹고 아우 삼아 웃음을 나누다가도 여차해서 부아가 치밀고 말이 험해지면 총을 겨누고 죽이고 치명적 상황에 빠져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게 분단이었지. 낄낄대며 농담을 주고받던 상대가 언제 돌변해 주먹을 휘두르거나 총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었거든. 그렇게 판문점을 들고 났던 사람들 가운데 북한 인민군 군관(장교) 박철이라는 자가 있었어.

육군사관학교나 ROTC 등 장교 양성 제도를 운영하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일반 병사나 하사관 중에서 우수한 이를 뽑아 군관 교육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고 있어. 그런데 각 부대에서 필요한 이를 단기 속성 교육 후 ‘직발 군관(현지 임관)’으로 배치하기도 한다는구나. 박철이라는 사람도 직발 군관이었다고 해. 그는 어떤 분야에서 자질을 보였던 걸까.

세상 어느 곳에나 ‘적극적인’ 사람들은 존재해. 적극성과 공격성은 다른 개념이지만 종종 비슷하게 보일 때가 있지. 더구나 적대 국가 간의 군인들끼리는 더욱 그래. 박철이라는 이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군인 중 하나였어. 박철이 판문점에 근무한 건 1970년대 중반, 즉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역사상 첫 패전을 당해 물러서고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시기를 전후해서였어. 즉 미국의 코가 깨지고 공산 측 기세는 매우 등등할 무렵이었지.

1975년 6월30일, 그러니까 남베트남이 멸망한 지 딱 두 달 뒤 판문점. 유엔군 소속 미군 소령 헨더슨에게 북한 기자 하나가 시비를 건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우.” 북한 기자가 침을 뱉고 주먹까지 날리자 헨더슨 소령도 맞대응을 했는데 북한 경비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헨더슨을 덮쳐 무자비한 폭력을 퍼부었지. 한국군들이 대거 달려와서 뜯어말렸지만 폭행 피해는 심각했어. 헨더슨 소령은 목뼈가 부러지고 장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는데, 이때 ‘맹활약’을 한 게 박철 중위였어. 그는 구두에 쇠징을 박고 다녔다고 해. 또각또각 쇳소리를 내며 좌중을 기분 나쁘게 하던 그 구두를 가지고 박철은 미군 장교를 사정없이 밟아버렸던 거야. 박철은 ‘쇠못 구두의 사나이’로 미군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지. 북한의 높은 사람들은 이런 박철의 행동을 오히려 기꺼워했던 것 같아. 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투쟁’의 과정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직발 군관 박철은 득의양양하게 판문점을 누볐으니까.

소련인 관광 가이드의 망명과 북한군 박철

그로부터 1년 뒤 이 인민군 군관은 경계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유엔군 장교 두 명을 도끼로 때려죽이는 범죄의 장본인이 되었어. ‘8·18 도끼 만행 사건’이야. 미국과 남과 북 모두 전쟁 직전 상황에 돌입하게 만들었던 일대 사건이었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의기소침해 있던 미국이지만 자국군 장교가 도끼에 맞아 죽었다는 뉴스 앞에서 능히 북한을 날려버릴 만한 전력을 동원해 압박에 나섰어. 워낙 도끼 만행의 증거가 확연한 터라 중국과 소련도 대놓고 북한 편을 들지 못했고, 북한은 아주 드물게 꼬리를 내리게 돼. 김일성은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시했고, 미국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여 문제가 됐던 미루나무를 절단해버리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하려 했어.

ⓒ연합뉴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이 도끼를 휘둘러 유엔군 장교 두 명이 숨졌다.

그러나 오히려 한국군이 더 강경하게 나왔어. 한국군 공수부대는 비밀리에 무기를 휴대하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 참여했고 미군의 만류를 뿌리친 채 북한군 초소를 때려 부쉈단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부르짖고 있었으니 당시 한국군의 머릿속은 박철 중위가 쇠못 박은 구두로 헨더슨 소령을 짓밟을 때의 증오와 비슷한 색깔과 열기의 분노로 그득했을 거야. “빨갱이들, 반항하면 죽인다.” 박철 중위를 비롯한 북한군은 묵묵히 지켜보거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물러섰어. 당시 박철 군관의 표정이 궁금하구나. 명령을 받고 한 행동이건 독단적인 행동이건(이 가능성은 적다만)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이 사건 이후 판문점에도 명확한 남북 경계선이 생기고 높이 5㎝ 콘크리트 선은 만리장성 성벽처럼 남과 북을 갈라놓았다. 전처럼 대화를 주고받기 어려워졌고 뒤섞여 대화를 나눌 수도 없게 되었지. 박철은 그래도 판문점에 남아 있었다고 해. 북한 당국의 태도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그런데 또 한 번 판문점에서 총성이 울렸어. 1984년 11월23일.

소련인 관광 가이드로 판문점에 왔던 바실리 마투조크라는 사람이 회담장을 촬영하던 중 별안간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망명을 요청한 거야. 당시 판문점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신형주씨가 국방TV 다큐멘터리 <북한 도발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마투조크가 넘어온 직후 인민군 두 명이 권총을 쏘며 그의 망명을 저지하려 들었고 이어 인민군 1개 분대가 분계선을 넘어왔어. 마투조크는 무사했지만 양쪽 병력들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지. 한국군 1명이 전사하고 북한군은 7~8명이 쓰러졌다. 엉겁결에 분계선을 넘은 이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다큐멘터리 <북한 도발사>에서는 북한군 3명 정도가 사살됐다고 보는데 그중 한 명이 박철이라고 지목했어. 미군을 때려눕히고 쇠징 달린 구두로 짓밟았던 ‘쇠못 구두의 사나이’에 ‘도끼 살인마’라는 악명까지 지녔던 박철은 결국 남북 충돌 중에 그 짧은 인생을 마친 걸로 추정된단다. 남한 측 경비병들이 먼발치에서도 알아보고 경계했던 인물이었으니 집중사격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박철은 그 후 판문점에서 사라졌고 나타나지 않았어.

나이도 모르고 고향도 알 길 없는 ‘코리안’ 박철. 분단된 나라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어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한껏 발휘했던 그 난폭함이 끔찍하게 징그러울망정 그의 최후가 안쓰러워지는 이유는 남쪽에서도 비슷한 사람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 거야. 빨갱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 빨갱이라고 지목됐다는 이유로 짐승 같은 고문을 퍼부은 사람들, 자신들이 빨갱이라고 믿는 민간인 머리를 수박처럼 깨버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헬리콥터에서 기관총을 쏘아 갈긴 사람들, 그들 역시 박철이 발휘했던 잔인함의 체현자 아니었겠니. 분단이라는 외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사양하지 않았던, 또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무섭고 우스운 광대들이 아니었겠니. 판문점은 그 광대놀음판의 최말단이자 시작점이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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