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나는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처음 알았다. 남대서양에서 원인 미상으로 침몰한 스텔라데이지호를 추적하면서다(〈시사IN〉 제536호 ‘스텔라데이지호를 찾아서’ 기사 참조). 지난해 9월 4개국 67일간의 취재를 떠나기에 앞서 심해에서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에어프랑스 447편의 블랙박스를 심해에서 회수한 사례가 있었다.

2009년 5월31일 228명을 태우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를 향해 출발한 에어프랑스 447편이 실종됐다. 2년 뒤인 2011년 7월 심해 3900m 지점에서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40×20×20㎝인 블랙박스를 찾았다. 프랑스 현지 취재를 통해 블랙박스를 수거한 주역이 우즈홀 해양연구소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AP Photo2015년 7월17일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상징인 대형 연구선 아틀란티스가 유인 잠수정 앨빈을 수중에서 건져 올리고 있다.
이런 정보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에 알렸다. 실종자 가족들의 노력으로 지난 4월19일 국회에서 열린 ‘스텔라데이지호 심해 수색장비 투입 검토 공청회(외교부·해양수산부 등 주최)’에 우즈홀 해양연구소 소속 심해 수색 전문가를 초청했다. 현재 우즈홀 해양연구소 첨단이미지·시각화 연구실장인 윌리엄 랭 박사와 타이태닉호의 유물 및 잔해 관리업체인 ‘RMS 타이태닉’ 선임고문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 갈로 박사였다. 갈로 박사는 원래 우즈홀 해양연구소 소속이었다. 이날 공청회에서 랭 박사는 “스텔라데이지호 상부 구조 어딘가에 블랙박스가 있다면 수색 뒤 블랙박스를 회수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시사IN〉 제554호 ‘침몰 원인 밝혀줄 3000m 아래 블랙박스’ 기사 참조).

두 박사의 2박3일간 짧은 방문은 실종자 가족들을 더욱 목마르게 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수색장비를 투입해 통상 블랙박스라 불리는 VDR(Voyage Data Recorder·선박항해 기록장치)을 수거하기를 바랐다. 이 장치에는 항해 기록과 선교 근무자의 음성 기록 등 여러 내용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만큼 이 블랙박스를 수거해 분석해보면 침몰 원인을 밝히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실종자 가족들은 주장한다.

ⓒ김영미 제공김영미 편집위원이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듀란테 박사에게 심해 수압에 대해 듣고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하지만 국내에서는 심해 3000m 밑에 가라앉은, 축구장 3개 면적을 합친 크기의 배에서, 배 앞쪽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수거해본 적이 아직 없다. 실종자 가족들은 미국에 있는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직접 찾아가 어떤 기술과 장비가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허영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대표는 나에게 “가족들과 같이 우즈홀 해양연구소로 가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지난 4월8~15일 침몰 사고 구조 책임국이었던 우루과이 현지를 다녀오기도 했다(〈시사IN〉 제554호 ‘다시 스텔라데이지호를 찾아서’ 기사 참조). 그런 그녀의 부탁과 함께 이번에도 언론인으로서 ‘면피 의식’이 나를 미국으로 떠밀었다. ‘기자들이 아무도 현장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물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을 방문한 윌리엄 랭 박사를 통해 우즈홀 해양연구소 취재 허락을 받았다.

5월13일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에서 뽑힌 김재복씨(가명)와 동행했다(김씨의 신상 공개로 받을지 모를 피해를 우려해 가명을 쓴다).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직접 찾아간다고 심해 수색의 모든 메커니즘을 이해할 순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용을 알려고 실종자 가족들은 공과대를 졸업한 김씨를 가족 대표로 뽑아 나와 동행하게 했다.

5월13일 저녁 11시(현지 시각), 김씨와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보스턴에 도착했다.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뒤 5월14일 우즈홀 해양연구소로 향했다. 보스턴에서 1시간30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매사추세츠 주 우즈홀에 도착했다. 우즈홀은 휴양도시로 유명하다. 해양연구소의 이름도 이곳 지명에서 유래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 제공
ⓒ김영미 제공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무인 잠수정 제이슨 주니어(맨 위). 위는 특수 제작된 수중 카메라에 대해 설명 중인 에번 코박스 박사(위).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1930년에 설립된 비영리 민간 해양연구소다. 민간 연구소로 출발했지만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침몰한 미국 군함의 수색 작업을 이 연구소가 맡았고, 해군 관련 각종 연구 사업을 수행했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현재 연구원 1400명이 재직하는, 세계 최고의 해양 과학기술 분야 연구기관이 되었다. 매년 16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쓰며 1000개가 넘는 연구 과제를 수행한다. 국립과학재단이 최대 지원 기관이며 미국 해군, 국립해양대기청, 에너지부, 미국지질조사소, 국립항공우주국 등도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찾은 나와 김재복씨는 한국을 방문했던 윌리엄 랭 박사를 먼저 만났다. 랭 박사의 연구실은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에는 큰 탁자와 대형 모니터, 각종 영상장비가 놓여 있었다. 랭 박사는 심해 촬영 전문가이다. 어두컴컴한 심해에서 각종 첨단 장비로 고화질의 사진과 영상을 촬영한다. 랭 박사와 함께 일하는 에번 코박스 박사는 “티타늄으로 만든 덮개를 씌운 카메라만이 심해에서 수압에 견디며 선명하게 촬영을 할 수 있다. 숱하게 실패를 거듭한 결과 우리는 가장 최적으로 심해를 촬영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라고 설명했다.

1985년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대서양 해저에서 1912년 4월14일 침몰한 타이태닉호를 찾아냈다. 랭 박사도 타이태닉호 수색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심해 4000m에 들어간 것처럼 당시를 생생히 떠올렸다. “처음에는 타이태닉 선체 안으로 무인 잠수정을 들여보냈다. 그 순간 마치 타이태닉이 되살아난 것처럼 설렜다.”

심해 탐사는 난관의 연속이다. 바다 속에도 폭포가 있고 계곡과 산맥이 있다. 또 육지의 분화구처럼 가스를 분출하는 화산도 있다. 그런 곳을 사람이 직접 들어가 탐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로봇 잠수정을 투입한다.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잠수정 기술도 앞서 있다. 타이태닉호 탐사 때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유인 잠수정 ‘앨빈’이 투입되었다. 앨빈은 해저 4500m까지 내려갈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4월19일 ‘스텔라데이지호 심해 수색장비 투입 검토 공청회’가 국회도서관에서 열렸다.
여기에 수심 6500m까지 내려가 탐사할 수 있는 무인 잠수정 ‘제이슨Ⅱ’도 보유하고 있다. 선체에 들어가 탐사할 수 있는 제이슨 주니어도 개발됐다. 이 외에도 수심 1만1000m를 탐사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원격조종 무인 심해탐사선 ‘네레우스’, 수심 5000m를 탐사할 수 있는 무인 무선 탐사선 ‘아베’ 등이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대표 선수들이다.

나와 김재복씨는 수압 테스트 연구실을 찾았다. 이 연구실에서는 특별 제작한 기계가 심해 1만1000m에 들어가서도 수압을 이겨내고 정상 작동하는지 실험 중이었다. 연구실 책임자인 브라이언 듀란테 박사는 “우리는 아주 조금씩 수압을 높여가며 각종 실험을 한다. 로봇 잠수정의 케이블이나 배터리, 유리 부품, 티타늄 카메라 덮개 등 모두가 여기 실험을 걸친 후 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실험 기계는 마치 보일러 온수통처럼 생겼다. 이 안에 테스트 대상을 넣고 수압에 얼마나 견디는지 실험했다. 듀란테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심해가 어디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장 깊은 곳 수심이 1만1000m인 마리아나 해구다. 지금 1만1000m에서 수압을 견뎌낼 수 있는지 실험 중이다. 이제 인류는 지구 곳곳의 모든 바다를 정복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나는 실패를 얼마든지 환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텔라데이지호 사고를 듣고 침몰한 스텔라데이지호가 심해 몇m쯤에 있는지 물었다. 동행한 김재복씨가 “남대서양 심해 3000m다”라고 답하자, 그는 “대서양 3000m 심해는 이미 20년 전에 우즈홀 해양연구소에서 탐사에 성공했다. 어려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취재하며 심해 탐사 성공을 위해서는 항법 기술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법 혹은 내비게이션 기술은 심해에서 탐사 대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준다. 침몰한 배나 비행기가 깊은 바다 어느 곳에 있으며 어떤 모습일지 3D 기술로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

20년 전 가라앉은 더비셔호도 찾아내

ⓒ김영미 제공‘RMS 타이태닉’ 선임고문인 데이비드 갈로 박사
ⓒ김영미 제공로런스 메이든 우즈홀 해양연구소 부소장
윌리엄 랭 박사는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항법 기술을 설명하며 1997년 진행한 탐사 사례를 들었다. 1980년 9월, 일본 오키나와 남동해상에서 영국의 17만t급 더비셔호가 44명을 태운 채 침몰했다. 영국 해양 사고 사상 가장 규모가 컸다. 침몰 원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조사에 나선 영국 정부는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것으로 결론 냈다. 유가족들은 선박에 구조적 결함이 있다며 진상 규명을 정부에 요구했다.

1986년 더비셔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선박이 또다시 좌초하자 영국 정부도 재수색에 나섰다. 1997년 랭 박사는 수중 로봇을 투입해 심해 4000m에 가라앉은 더비셔호 사진 13만7000장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랭 박사는 “더비셔호 수색 당시 고도의 항법 기술이 없었다면 20년 전 가라앉은 배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했고 우리 연구소가 참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 방문 내내 저녁에는 숙소에서 한국에 있는 허영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와 화상회의를 했다. 허 대표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녀는 스텔라데이지호가 있는 심해 3000m에 어떤 장비들을 동원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허영주 대표는 “어쩌면 가족들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타고 있던 배가 왜 침몰했는지 밝힐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다. 최대한 증명된 기술과 장비가 동원되어야 스텔라데이지호를 심해에서 찾아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배의 인양이 아니다. 시민들이 ‘그 큰 배를 어떻게 건져 올리느냐, 가족들이 불가능한 것을 원하는 게 아니냐’라며 오해를 하는데, 가족들은 블랙박스만이라도 수거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블랙박스는 사고 원인 규명에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 4월 국회 공청회에서 처음으로 스텔라데이지호의 블랙박스 사진을 공개했다. 허경주 공동대표는 “제보자를 통해 어렵게 블랙박스 사진을 구했다. 스텔라데이지호에는 분명 블랙박스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공청회를 통해 블랙박스 수거는 침몰 원인을 밝히는 데 중요하며,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된 데는 한국을 찾았던 데이비드 갈로 박사의 영향이 컸다. 그는 에어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조사와 블랙박스 회수, 타이태닉호 탐사, 2015년 침몰한 미국 화물선 엘파로호 블랙박스 수거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풍부한 경험 자체가 설득력이 있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갈로 박사에 대해 물으면 누구든 “그는 최고다”라며 찬사를 보내곤 했다.

ⓒ시사IN 신선영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1년이 지난 3월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1년의 기다림’ 문화제를 열었다.
이번 취재 때 데이비드 갈로 박사도 만났다. 나는 그에게 어떤 수색 작전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갈로 박사는 “타이태닉도 잊을 수 없는 작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에어프랑스 447편 블랙박스 수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2009년 5월31일 에어프랑스 447편이 대서양 상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자, 테러와 비행기 기체 결함 등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며칠 뒤 브라질 인근 해안에 시신 50여 구가 떠올라, 비행기가 폭파되어 심해에 가라앉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블랙박스를 수거해야 정확한 사고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여객기가 추락한 지점은 수심이 3000∼6000m나 되었다. 프랑스 정부와 에어프랑스 측 요청을 받은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가 수색에 나섰다. 심해 수색 과정을 알고 싶어서 나는 지난해 11월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 관계자를 만났다. 하지만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 관계자들은 에어프랑스 447편과 관련한 인터뷰를 꺼렸다. 간신히 설득해 인터뷰에 성공했다. 이 연구소 관계자는 “에어프랑스 447편 수색은 우리 연구소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우리가 1차, 2차 수색을 진행했지만 블랙박스 수거에 실패했다. 3차 수색에 나선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블랙박스를 회수했다. 우리도 그쪽과 동등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라고 말했다. 국립해양개발연구소의 블랙박스 수거 작업이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 정부와 에어프랑스는 마지막으로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요청에 따라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갈로 박사팀이 투입되었다. 사고 2년 뒤인 2011년 7월 심해 3900m 지점에서 블랙박스를 찾아냈다.

블랙박스 분석 결과 사고 원인은 테러도 기체 결함도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부조종사의 실수였다. 조종사가 휴식을 취한 사이 비행 경험이 짧은 부기장의 실수로 비행기가 추진력을 잃고 바다에 추락한 것이었다. 에어프랑스 447편 제조사인 에어버스 관계자는 “블랙박스 수거 후 기체 결함이 주원인이 아님을 밝혀냈다. 우리는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에서 이 사건을 해결할 줄 알았다. 그들을 믿다가 무려 2년간 우리도 유가족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에어버스 관계자에게, 왜 마지막 선택이 우즈홀 해양연구소였는지 물었다. 그는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블랙박스를 발견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에 기대해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갈로 박사는 “사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미국인인 우리를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탐사를 하려면 프랑스와 협의가 필수였다. 우리는 회의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고성을 질러가며 싸웠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술 외적인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갈로 박사는 “에어프랑스 수색 때 우리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힘들고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희생자 228명의 이름을 적어놓은 보드를 보며 힘을 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블랙박스를 수거한 날의 소회를 물었다. 갈로 박사는 “어느 정도 범위가 좁혀 들어가면 블랙박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블랙박스를 수거한 순간 가장 먼저 희생자 이름과 내가 만났던 유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 우즈홀 해양연구소 측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들은 우즈홀 해양연구소 수색이 결정되자 많은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지난해 프랑스 취재 때 만난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 부대표 라미 씨는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새로운 기술로 수색을 한다니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그때 성공하지 못했다면 다시는 수색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는 사고 원인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갈로 박사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을 대표한 김재복씨에게 여러 조언을 했다. 그는 의외로 심해 탐사 기술보다 인도주의를 강조했다. 갈로 박사는 “당시 프랑스 정부 관리들과 에어프랑스 관계자,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 연구진들과 싸워가며 수색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유쾌하지 않다. 내가 끝까지 참은 이유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잘 알고, 또 우즈홀 해양연구소 학자로서 내 자존심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동행한 김재복씨는 갈로 박사의 조언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취재 기간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이때 가장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에어프랑스 사고 때와 달리 정부 지원의 한계 때문에 심해 탐사 기회가 단 한 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블랙박스를 회수해야 침몰 원인에 다가갈 수 있다. 국내 관련 기관과 업체는 심해 3000m에서 블랙박스를 회수한 경험이 전무하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살릴 적임자는 ‘경험’을 가진 우즈홀 해양연구소였다.

한국 정부가 요청해도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기술 외적인 문제’를 들어 탐사를 거부한다면?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넘버 2’ 로런스 메이든 박사 면담을 요청했다. 부소장이자 책임연구관인 그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방문 소식을 듣고 다른 일정을 취소한 뒤 면담에 응했다. 메이든 박사는 먼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가족을 대표한 김재복씨에게 위로를 표했다. 나와 김재복씨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와 심해 탐사에 부정적인 국내 관련 기관의 반응, 그리고 지난 4월 데이비드 갈로 박사 등이 참여한 국회 공청회 등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 연구진들은 최대한 기술 외적인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한다. 갈로 박사는 에어프랑스 사고에서 특히 항공기 제조사나 엔진 제조사 등 미국·프랑스의 관련 기업이나 단체들과 협력해야 했다. 문제는 각 기업이나 단체가 사고에 대한 각기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었고 지금 스텔라데이지호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요청해온다면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스텔라데이지호 사고를 적극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기술로는 AIVL(Advanced Imaging and Visualizing Lap)이 첫 번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장비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엘파로호 비문’ 앞의 스텔라데이지호 가족

부소장인 메이든 박사한테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지만 김재복씨의 얼굴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에어프랑스 사례에서 보듯 기술 외적인 문제가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현재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은 해양수산부, 외교부와 함께 TF를 구성해 심해 수색장비 투입과 블랙박스 수거를 논의 중이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화상회의를 하며 허영주 대표는 “정부 예산으로 대서양에 가서 블랙박스를 수거하는 것은 처음이다. 에어프랑스 사고처럼 복잡한 상황이 발생해 실패할까 봐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 방문 마지막 날인 5월17일, 나와 김재복씨는 보스턴 시내 근처에 있는 해양 전문학교인 매사추세츠 메리타임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교정 한가운데에는 2015년 침몰한 엘파로호 희생자 명단이 담긴 비문이 있었다. 희생자 가운데 이 학교 출신들이 있어서 재학생들이 세운 것이다. 엘파로호 침몰 원인도 윌리엄 랭 박사팀이 밝혀냈다.

2015년 10월, 엘파로호는 미국 플로리다를 출발해 푸에르토리코로 향하다 허리케인 호아킨을 만났다. 길이 225m에 달하는 화물선인 엘파로호는 바하마 크루커드섬 인근에서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위성 신호를 보낸 후 연락이 두절됐다. 사고 10개월 만인 2016년 8월 랭 박사팀이 심해 4570m에서 블랙박스를 찾는 데 성공했다. 선장의 육성이 담긴 이 블랙박스는 엘파로호의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직접적인 침몰 원인은 허리케인이 아니었다. 화물칸에 해수가 유입되는 등 선박의 구조적 결함과 함께 선장이 퇴선 결정을 뒤늦게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선장은 최신 기상 정보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재였다.

김재복씨는 엘파로호 희생자 비문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김씨는 “엘파로호도 안타까운 사고인데, 그나마 블랙박스를 수거해 사고 원인이라도 규명되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 처지에서는 진상 규명이 된 엘파로호 사고마저 부럽다”라고 말했다. 나와 김재복씨의 일주일 일정의 우즈홀 해양연구소 취재가 끝났다. 귀국길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외교부와 해양수산부 등 관계 부처는 지난 4월 국회 공청회 이후 기술 타당성 검토를 끝냈다. 정부는 조만간 국무회의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심해 수색을 위한 예비비 예산안을 심의 의결할 방침이다.

기자명 매사추세츠·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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